Perfectionism

완벽주의라는 것..

흔히들 완벽주의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증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언뜻 들으면 “감히 인간인 주제에 신이나 할 수 있는 ‘완벽’에 도전하겠다니 미친 거 아닌가?” 할 수 있을 듯 하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스스로 완벽하려고 한다는 것은 쉽게 말해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닐까 한다.

나는 완벽주의와는 거리가 멀지만 누군가 안좋은 소릴 하는 것에 너무 취약하다.

그저 ‘이걸 일이라고 해놓은거야??’ 라든가 ‘뭘 하라고 XX시간이나 줬더니 고작 이걸 해놓은 거야?’, ‘이거 밖에 못해 고작?’라는 말을 듣기 싫은 것이다.

더 나아가서 나란 인간이 지금까지 오기까지 소요된 비용으로 볼 때 전혀 제구실을 못했다라는 말을 듣기 싫은 것이다.

써놓고 보면 좀 황당하지만, 나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매우 많으리라 본다. 그런 세상에서 너무 오래 살아왔다. 저렇게 말도 안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봐왔다. 또 그게 성공의 지름길인양 하면서 여태도 저렇게 깝치고 다니는 인간들이 많이 있다. 내가 여기에 이름을 적으면 다 알만한 사람들이다.

이렇게 된 원인을 꼭 찾아내야 할 이유는 없지만, 조금 생각해보면 획일된 기준으로 너무 오래 교육받아왔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학생들의 능력을 평가하는 기준이 오직 한 가지 밖에 없고, 그 기준에 벗어나는 생각을 하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고, 정해진 순서대로 공부해야 되고 그렇게 시킨대로 따라간 사람만을 인정해주고 그것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패배자’, ‘낙오자’, ‘똘아이’ 취급하는 문화에 너무 오래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앎의 폭을 넓혀가면서 타인을 엄청나게 깔아뭉개고 스스로 정신 파탄자임을 인정하며 타인들에게 패배자 투사를 하던 다양한 인간 군상들도 그들이 소위 학생시절, 쥬니어 시절이었을 때는 그들 기준으로 참으로 한심하고 보잘것 없는 인간들이었음을 알게 된다.

또 시간이 더 흘러 내가 자라고 교육받은 곳에서 멀리 떠나와서 살고 보니, 그동안 내가 뭔가 이뤄놨다 하는 것은 사실 한국의 좁은 구석을 벗어나서는 모두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소위 골목대장 노릇을 하느라 짖어대던 타인들에게 무능력자라는 투사를 하던 인간들도 어딘가에서 아무도 그렇게 얘기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무능력자라고 생각하면서 불안의 고통을 곱씹었던 모양이다.

우리에게 패배자임을 투사시켜왔던 그들도 어찌보면 성과주의, 학벌주의, 족벌주의의 피해자이자 가해자였다고 봐야 옳을 것 같다.

나는 나 자신일 때 가장 훌륭하고 가장 우월하고 우수한 존재가 된다. 내가 타인의 잣대에 따라 움직일 때 만큼이나 부자연스럽고 괴롭고 살기싫어질 때가 없다. 인간이 태어나는 것에 특별한 목적이나 의미는 없지만, 그 스스로가 타인의 굴레에 갇혀서 사는 것만큼이나 비극적인 것이 없다. 그렇게 스스로의 존재가 그 본질이 되지 못하니 불안할 수 밖에 없다.

완벽주의의 근원이 불안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완벽하지 않으면 무엇인가로부터 소외당할 것 같고 외면당할 것 같은 불안함, 나란 존재가 더 이상 살아나갈 수 없게 될 것이라는 불안감에서 온다는 것이다. 이것은 더 생각해볼 것도 없다. 나라는 존재가 나의 실체가 되지 못하니 불안한 것이다. 내가 내가 아닌 누군가로 살아가려고 애쓰다보니 힘이들고 불안한 것이다. 나라는 존재가 나의 실체와 동일한 존재가 된다면 어떤 것으로부터 소외당할 수 없고 외면당할 수 없다. 나라는 존재가 나의 실존으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에 나의 실체가 아닌 다른 존재로부터 인정받아야 안정감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누군가의 평가를 받기 싫어서, 아예 이들이 요구하는 것보다 쓸데없이 높은 목표를 설정해서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도 결국 같은 의미이다. 나의 실존이 ‘나’이지 못하니 누군가로부터 나의 존재를 인정받아야만 마음이 놓이는 것이다. 누군가의 평가는 나란 존재를 인정해줌을 의미하고, 그러한 평가가 좋지 못함은 나란 존재의 무의미함을 뜻하고, 죽음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더 나아가서 보면, 이 사람에게는 어떠한 심리적인 안전망이 구축되어있지 못하는 것이다. 이번 시험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 하면 그것이 곧바로 죽음으로 연결되는, 존재의 파멸로 연결되는 것이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 옛날 선지원 후시험 학력고사 세대가 그런 공포감속에 지났듯이 말이다. 지나고보면 떨어져서 재수하는 것 쯤 능히 할 수 있는 일이고, 두 번에 안되면 세번이라도 할 수 있고, 그렇다고 아예 다 떨어져서 대학에 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의 생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다만, 평생 “나는 대학시험에 실패한 ‘패배자’이다”라고 생각하는 문제가 남듯이. 본인 스스로가 패배자라고 인정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그 사람을 패배자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나 인생을 살아가는 이상 그 누구도 비난받지 않은 사람이 없고, 그 누구도 ‘실패’ 내지는 ‘실수’를 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세상에는 그렇게 실수하고 실패한 ‘패배자’, ‘인생 낙오자’로 넘쳐난다.

도무지 누가 대학에 제대로 진학 못한 사람은 ‘인생 패배자’ 내진 ‘낙오자’라고 부르기 시작했는지 알 수 없지만, 내가 그 혹은 그들에 하고 싶은 말은 ‘미친놈이 따로 없네’이다.

인생에서는 누구도 실패하지 않고 누구도 낙오하지 않는다. 저마다 살아가려는 방향이 다르고 걸어가는 길도 다르다. 왜 인생에 획일적인 잣대를 만들어 놓고서는 그길을 따라가려 하지 않거나 따라오지 못하는 사람들을 낙오자, 패배자라고 부르고 따돌림 시키려는가?

그런 ‘미친놈’들에게 낙오자, 패배자 소리를 듣고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그렇게 투사 받아서 내 인생을 말 그대로 패배자의 삶으로 꾸려가는 것이 진정 패배한 삶이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그 누구의 잣대에 맞추어 살아갈 이유도 없고 그래야 할 의무도 없다. 그 누구에 의해서 인생이 평가받아야 할 이유도 없고, 평가할 주제의 인간도 없다. 성인으로 살다가신 분들이 이 땅의 중생들의 인생을 평가하다 가셨는지 생각해봐라. 그 분들 역시 이 땅의 어리석은 인간들에 의해 평가받고 심판 받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에고에 심하게 쩔은 성격파탄자들이나 하는 짓이다.

지금이라도 완벽해야 살아남는다 라거나 완벽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는 불안감에 사로 잡혀있다면 곰곰히 스스로의 인생을 되돌아보길 바란다. 나처럼 헛소리같은 소리라도 길게 적어가다 보면 내가 어디에서 길을 잘못들어 원치않는 이 상황까지 오게 되었는지 조금이나마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