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의미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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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본 영화인 ‘Anesthesia’를 보면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어디에 두고 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했던 것 같다. 국내 번역 제목은 ‘월터 교수의 마지막 강의’인데, 원제와 비교하면 차이가 좀 많이 난다싶다.
이 영화를 보고 당장 느끼게 되는 것은, ‘당장 오늘 저녁 죽게 될지도 모르는 존재들이 참 힘들게들 살아간다’ 였다. 이 영화가 일종의 옴니버스식 구성이라 여러 가지 삶을 계속해서 잠깐 잠깐 돌아가며 보여주는데, 다들 자신이 옳다 생각하는 삶을 살아가지만 그 어느 삶도 타자로부터 제대로 살아간다 인정 받는 삶은 없다. 스스로가 좀 까다로운 기준을 가지고 있다면, 자신의 삶은 정상적이다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 그 누구의 삶도 정상적이다 할 수 없을 수도 있다.
마지막 강의를 감동적으로 마친 교수님의 삶은 딱히 지적 받는 것이 없긴 하지만 (스스로 최선을 다했다고 얘기하기도 하지만), 길거리에서 돈 좀 달라고 하는 이에게 지갑을 열어주지 않은 죄(?)로 길에서 칼을 맞아 죽는다(죽는 장면은 나오지 않지만 사실상 거의 죽게 된다).
살아가는 그 자체가 멀쩡해 보이는 다른 등장인물들의 삶도 가만 가만 뜯어보면 비정상적인 요소가 다분하다. 비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그 기준이 어디서 온 기준인지는 몰라도 다들 불만족에 가득 차 있다. 그 불만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어떤 인물들은 술과 약물에 의존하기도 하고 자해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불만족의 원인도 따져보면 사실 별 것 아니고, 다분히 용서하고 이해해 줄 수 있는 것이지만, 그 누구도 양보/이해/배려하지 않고 그런 문제를 너도 나도 ‘anesthesia’에 의존한 채 팽팽하게 대립하고만 있다.
이 영화가 그 대립이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진 않지만, 단순히 영화를 바라보면 서로가 서로에 대한 불필요한 기대를 접고 사랑을 베풀면 조금이나마 좋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쉽게 하게 되지 싶다. 너도 나도 스스로의 욕심과 어리석음으로 타자에 대한 기대는 늘어가는 반면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생각이 없으니 대립은 격화되기만 할 뿐 나아지지 않는다.
그런 것이 인생이고 그렇게 인생은 아픔을 겪어 내야하는 것인데, 그 아픔을 알면서도 새로운 세대가 같은 아픔을 겪게 끌어들이고 있다는 말도 나온다.
세상에 태어나 보낸 시간이 늘어가면 늘어갈 수록 무엇이 옳다 그르다를 이야기하는 것보단,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이 다른 이들을 어떻게 이해하며 받아들여야 내가 덜 아프고 덜 다칠까를 생각하게 되는 시간만 늘어간다.
생을 마쳐야 되는 그 순간을 생각하면 남기거나 이룩하는 것 또한 이 세상을 떠나갈 존재인 나 자신에겐 모든 것이 무의미 하니 살아가는 순간 동안 나에게 진정한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고 그 기쁨을 얻는 방향으로 살아가고 싶을 뿐이다. 물질적인 즐거움, 육체적인 즐거움은 그것을 바라고 얻기 위한 노력에 비해 그렇게 값지지 않고 길지도 않고 또 반드시 그 이상의 대가를 요구한다. 타인에게 도움을 주는 즐거움, 또 그런 좋은 마음이 상대방과 통했을 때의 정신적인 기쁨이 더 크다는 것을 더 많이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