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셧다운

할 일이 없는 것도 고통이구나 싶다. 할 일이 많아서 고통인 것보다 할 일이 없는 고통이 더 크다. 그걸 감안해서 2주짜리 프로젝트를 만들어볼까 했는데, 어영 부영 놀게 되었고 막상 노는 날이 지속되니 뭔가 머리에 힘주는 일도 하기 싫어진다.

운동을 해볼까 했더니 gym도 마찬가지로 shutdown이다. 아무 공지가 없어서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다. 머리에 힘은 주지 않더라도 몸에 힘주는 일은 일단 게을러지게 되면 다시 몸도 마음도 빌빌하던 예전으로 돌아가게 될까 싶어 어떻게든 보충하려고 하지만 사실 짐에서 1시간 넘게 이렇게 저렇게 몸을 혹사시키는 것만한 맨몸운동은 해본적이 없다.

돌아보면 1년 내내 제법 바빴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데, 그래도 역시나 해야 할 일이 많고 풀어야 할 문제가 많아서 머리속에 불필요한 잡념이 생기지 않는 것이 가장 고마울 따름이다.

주위에서 하나 둘 씩 잘나가는 사람들이 생길 때 마다 ‘나는 왜 이 모양…’, ‘내가 더 열심히 노력해왔것만…’ 하는 생각해봐야 별로 도움되지 않는다 생각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는 것도 맞다. 반대로 ‘이렇게 가다간 영영…’, ‘이렇게 일벌레로 늙어가는구나…’ 하는 생각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처해진 상황이 크게 돌변하게 되지 않고서는 사람이란게 뭔가 변화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게 당연한 일이라고 본다.

주로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은 이직을 하면서 그런 변화를 찾는데, 이직이란 것이 수평이동이라기 보단 조금씩 내 계급을 깎아먹으면서 가는 경향이 크다. 단지 업종의 연봉 인플레 때문에 연봉을 올려가는 기분은 있겠지만. 처음 시작한 자리에서 별 볼 일 없이 있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흐르면 (회사가 잘 한 덕택에) 자리 프리미엄을 얻는 것도 나름 방법이니까.

인생이란 게 살다 보면 그렇게 운전할 때 빨리 나가는 차선만 골라 변경하듯 하면 남들보다 어떻게든 빨리 가겠지 하겠지만, 늘 뜻하지 못한 변수라는 게 있게 마련이니까. 빨리 나가는 차선인 줄 알고 탔는데 원하지 않는 경로로 빠지게 되기도 하고, 급한 차선 변경으로 사고를 내기도/당하기도 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게 계속해서 뜻하지 않는 일들을 겪다보면 인생의 어떤 변화에 대해서 덤덤해지기도 하고, 되려 불안에 둘러싸여 지내는 사람들을 보기도 한다. 어떻게든 변화를 두려워하고 변화와 리스크를 최대한 피하기 위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사실 앉은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만 있다면 내 힘이 아닌 제 3자의 힘으로 잘 되게 되는 경우를 빼면 더 나아질 가능성은 없는 것이니까 어떻게든 무리를 해서 이동을 하려고 한다. 그런데 그 선택이란 것도 늘상 옳은 선택일 수가 없는 것이라 안좋은 선택에 한번 발을 들여놓기 시작하면 내내 하강곡선을 타는 사람들도 본다. 반대로 잘된 선택 한번에 위로 계속해서 올라가는 것도 보고. 또 그렇게 위만 바라보고 치열하게 살았는데 스스로의 문제로 혹은 주변의 문제로 종국에 허무하게 무너져내리기도 하고.

이런 상황에서의 최선의 묘수는 내가 가진 것들 잘 관리하고 과한 모험은 하지 않고 꾸준히 가는 것이다.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긴 한데 이런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도 운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세상엔 정말로 내가 생각할 수 없는 다양한 위험요소라는 게 있고 내 의지와 상관없이 살아가게 되는 순간이란 게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말 그런 때가 오더라도 이도 저도 어찌해볼 수 없는 상황이 1년이고 2년이고 지속되는 그 지경이라도 어떻게든 무너지지 말고 살아내야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에도 많은 회의가 든다. 그렇게 억지로 억지로 살아내었다고 한들 달라지는 게 있을까 하는 것 말이다.

이를테면 어떤 책의 전체를 읽어보지 않았지만 대충 서문 혹은 도입부분까지 읽어봤더니 이것은 비극이겠다 싶으면 그냥 책을 덮고 싶은 것이나 마찬가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읽어내려갈 수록 더욱 이것이 비극일 확률은 점점 높아만 가는데, 일약 대반전이 일어나서 끝까지 버텨오길 정말 잘했다 하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하며 버틴다는 것도 어처구니 없는 것 아닐까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끝까지 살아내라고, 그러면 반드시 좋은 날 온다고, 그렇게 그렇게 살아내라고 한다. 어차피 그들은 그렇게 말해도 책임질 필요 없으니까 최대한 좋게 말해도 되는 것이지. 적어도 그렇게 살아가는 날 들 중 하루라도 그래도 살아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그렇게 될만한 이유야 원인들이나 많이 있을테니까, 분명히 그럴 확률은 높을테니까, 또 안좋은 날이 계속되면 우리의 기대라는 것도 점점 낮아지게 될테니까, 삶이라는 게 불필요한 기대 같은 거 가져봐야 만족도만 떨어뜨리게 된다는 것은 그렇게 그렇게 알아가게 될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