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커피 마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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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애호가는 아니고 그냥 습관적으로 커피를 물대신 마셔대는 사람 중 하나로서, 평일엔 커피가 거의 무한대로 무상제공되는 공간에 있다가 그렇지 않은 집에서 머물고 있을 땐 스스로 만들어마셔야 되니 약간 신경을 쓰게 된다.

한국에서 살 때는 커피를 아무리 많이 마셔봐야 그 양이 얼마 되지도 않았고 (많아야 아메리카노 벤티 x 2-3잔 정도?), 커피집에 가지 않으면 흔히 구할 수 있는 게 인스탄트 커피였으니까 그것도 열심히 마신다고 해봐야 하루 2-3잔을 넘기기 힘드니 더 그랬다. 그래서 집에서 커피를 만들어마신다고 하면 뭔가 좀 특별해야 되는 게 아닌가 해서 재미삼아 이것 저것 다 해봤던 것 같다. 그 흔한 커피 메이커라든가 에스프레소 머신을 구입한 적도 있고 큐릭이나 네스프레소 머신이 있었던 적도 있고 소형 에스프레소 팟을 사놓고 썼던 적도 있었다. 커피 그라인더로 손수 갈아서 마신 적도 있다. 결국엔 다 고장나거나 버리거나 누굴 줬거나 했다.

지금은 프렌치 프레스만 쓴다. 다 귀찮고 커피만 빨리 마실 수 있으면 되니까. 그래도 모든 면에 있어서 이게 최고다. 맨날 판에 박힌대로 살아오거나 남들을 따라해야 ‘정답’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런 나를 ‘참 없어보인다’ 했던 것 같은데, 알게 뭐냐. 나만 좋으면 그만이지.

코스트코 애호가인 내 입장에서 Kirkland signature 100% Colombian coffee (dark roast)는 정말 좋다. 한국에서 살 때도 정말 좋아했다. 사실 좋다하는 커피 원두도 알째로 사다가 먹기도 하고 알을 산 뒤에 매장에 비치된 그라인더로 갈아와서 먹어보기도 하고 했지만, 최종적인 결론으로는 이 커피를 사다가 프렌치 프레스에 넣어마시는 것 이상의 것이 없었다.

깡통에 들어있고 일단 개봉하면 완전 밀봉이란 게 안되니까 이거 좀 마시다보면 향이 다 날아가서 별로 일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여러 달을 두고 마셔도 (적어도 처음엔) 커피 향이 아주 좋다. 신기하게도 커피향이란 게 코에 빨리 적응이 되어서 실제로 온집안에 커피 향이 진동하고 있어도 대개 1-20초 이내에 그것을 느낄 수 없어지게 된다. 그러니까 뜨거운 물에 커피 파우더를 넣고 대략 20초 정도까진 커피향의 즐거움을 느끼지만 이내 사라진다.

스타벅스든 어떤 필스커피든 커피를 파는 매장에 가서 커피를 마시다 오면 옷에 커피 냄새가 잔뜩 베어버렸다는 것을 커피 집을 다녀온지 한참 뒤에야 알게 된다. 사실 커피집 주변에서부터 그 향에 적응이 되어서 매장에 들어간지 얼마 되지 않아 코는 적응을 해버리기 때문이다. 신기하게도 담배를 피운 적도 없고 주변에서 담배 피우는 사람이 없어도 진한 커피향이 있는 곳에 다녀오면 마치 담배라도 피운 듯 옷에 진하게 베어있는 것도 알게 된다. 옷에 베어버린 커피향은 마치 담배 냄새가 베어버린 것처럼이나 느낌이 좋진 못하다.

말이 잠깐 샜는데, 프렌치 프레스를 쓰게 되면 커피 마시는 일이 매우 간단해진다. 물 데우는 기구로 재빨리 물을 끓이거나 아니면 전자렌지로 물을 뜨겁게 만든 다음 커피 파우더를 넣고 적당히 섞은 뒤 플런저 (plunger)로 적당히 꾹 눌러주면 된다. 당연히 커피 파우더을 많이 넣고 또 제법 많이 우려낼 수록 플런저를 누를 때 많은 저항을 받게 된다.

커피를 마시는 process가 너무 빠르고 간단하게 이루어지니까 (+돈을 별로 안들였으니까) 이렇게 마시는 커피는 뭔가 날림같고 형편없는 방법 아닌가 싶을 수 있는데, 어차피 향이나 맛을 결정하는 것은 커피 그 자체이지 process가 아니다. 내가 판단하기엔 가늘게 갈려진 커피 원두가 그 주된 역할을 한다고 본다. 같은 커피 파우더로 드립커피를 해서 마신다고 보면 커피 필터 (종이)가 사실상 그 가는 입자들을 거르거나 통과시켜주는 것을 결정하는데, 너무 많이 거르게 되면 사실상 맛이 없어지고 덜 거르게 되면 커피 가루가 느껴져서 역시나 느낌이 좋지 못하기 때문인데, 프렌치 프레스의 플런져에 달려있는 그 망은 나에게 딱 적당하다고 본다.

정작 커피를 그 옛날 즐겨마셨던 이들은 원두 그 자체를 냄비에 넣고 그냥 끓여먹었다니까 지금 마시

딱 보면 이게 반영구적으로 쓸 수 있는 물건이 아닐까 싶지만, 어느 정도 사용하면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비이커가 깨지게 된다. 그래봐야 허접한 커피머신 한대 사는 가격으로 프렌치 프레스는 10개 이상 살 수 있으니까 어찌보면 거저 마신다고 봐도 되는 것 아닐까 한다.

아쉽지만 누군가 프렌치 프레스로 커피를 마시는 나에게 한심스럽다는 멘트를 날리던 누군가로 부터 받은 트라우마가 아직 있어서 그런지 마실 때마다 그 순간이 떠올라서 마시는 즐거움의 2-30%는 날아가는 느낌이다. 이게 다 100%의 만족을 누리지 말라는, 적당히 모자른 대로 살아가라는 인생의 가르침이라 알고 살려고 한다.

이게 좋은 점이 몇 가지 더 있는데, 티백이 있는 차를 마실 때도 매우 유용하고 생강차를 만들어 마신다거나 할 때도 더 없이 좋다. 생강차를 마신 뒤에 남아있는 생강의 향 (아무리 열심히 세척/건조해도 이건 남아있다)이 커피향과 어우러질 때도 역시 느낌이 아주 좋다. 아 물론 그 옛날 프렌치 프레스를 쓰던 날 비난하던 사람은 여전히 날 ‘없는 놈’, ‘불쌍한 놈’ 취급하겠지만 말이다. 사람이란 것은 어차피 바꿔 쓸 수도 없고 변하지도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