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람스 교향곡 4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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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자리에 앉아 열심히 일을 하다보니 어디선가 들어봤던 선율이 머리 속에서 흘러나오는데, 사실 그것을 그것의 타이틀과 1:1 매핑하는 것이 쉽지 않았던 찰나, 순간적으로 이것이 브람스의 교향곡 4번 1악장이 아닐까 해서 유튜브를 찾아보니 정말로 4번이 맞았다.

뿌듯함을 뒤로하고 이것과 얽힌 다른 기억들을 떠올려보았다. 옛날 초등학교 음악 교육 과정에 보면 Brahms의 교향곡 듣기가 있었는데, 정확히 몇 번의 몇 악장을 들어보라고 한 것인지 불확실했던 기억이 있다. 그래도 어떤 작곡가의 교향곡이라고 하면 그 대표작이 번호로 쉽게 찾거나 외울 수 있다고 생각했던 나머지 아버지께서 모아놓으셨던 수많은 LP 중에서 브람스의 교향곡을 찾다가 1번을 4번을 열심히 들었던 기억이 있다. 우리가 이름을 기억할 수준의 작곡가들의 교향곡은 사실 그 어느 것 하나 빼놓을 수 없을 정도로 다 좋지만. 브람스의 교향곡은 1번과 4번이 정말로 잘 알려져있는데, 난 1번 보단 4번이 더 좋다.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져있는 브람스의 교향곡은 3번의 3악장으로 이 악장의 주제는 다른 곡들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듣기 쉬운 편이지만 전체적으로 듣다보면 역시 아무나 아니 그 누군가가 평생 노력한다고 해서 이런 레벨의 작곡가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로구나 하게 된다. 기억이 정확하진 않지만, 아마도 교과서에서 들어보라고 한 브람스의 교향곡은 3번의 3악장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3악장에 숨어있기에는 딱 들으면 ‘어?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듯한 주제인데?’ 하는 생각이 들만큼 튀는 곡이라고 생각한다. 또하나 놓칠 수 있는 것이 4악장인데, 4악장은 스타워즈의 존 윌리암스가 브람스의 영향도 많이 받았구나 하는 느낌이 든다.

교향곡 1번의 1악장은 2005?6년 쯤으로 기억되는데 노다메 칸타빌레라는 일본 드라마에서 꽤나 자주 나왔던 곡이다. 브람스의 곡들은 생각보다 매우 장엄하고 단조 분위기의 깊이가 특히 더 깊다고 해야할까, 무겁고 두터운 느낌의 단조라고 해야할까? 내 짧은 표현력으로는 그러하다. 바이올린 협주곡도 다른 작곡가들의 작품에 비해 그렇게 깊이가 있고 두터운 느낌이 있다. 그래서 더 좋다.

교향곡 4번으로 내가 처음 들었던 음반은 도이치 그라마폰에서 나온 카를로스 클라이버라는 분이 지휘한 것이었는데, 그 음반 표지가 참으로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난다. 이 곡을 지휘한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당시 사진이다. 기록을 보면 1980년에 녹음되었고 수상까지 받은 음반이라니까 더 뭔가 값진 것 아닐까 하지만, 당시 베를린 필하모닉 악단의 연주는 악기를 연주할 줄 모르고 더구나 해당 곡의 악보도 없을 일반적인 사람들 그 누가 들어도 (완벽이 어떤 정도인지 확실히 정의할 수는 없지만) 이것은 정말 완벽한 연주로구나, 원작자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작곡을 했을지 모르지만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닐까? 더 이상 더 좋은 답안이란 게 없겠다 싶을 정도로 훌륭하게 들렸으니까, 또 지금도 그렇게 들릴 정도니까 말이다.

대략 2천년대 초반에 체코의 어떤 악단/스튜디오가 오케스트레이션 서비스 및 완제품 제작을 정말 염가에 해주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에 많은 제작자들이 이들의 힘을 빌어서 양질의 음악을 정말 싸게 만들었던 시절인데, 오케스트라의 힘이라는 게 정말 어느 정도인지 경험해봤던 기억이 있다. 그저 컴퓨터 상에서 존재하는 노트라는 것은 그냥 노트에 불과하고 당시의 컴퓨터가 이 노트를 재현하는 수준이 워낙 허접해서였을지도 모르지만, 같은 노트를 수십인의 오케스트라가 연주하고 있을 때의 그 감동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악보라는 것이 담을 수 있는 정보량의 한계가 이 정도인 것인가, 아니면 내가 악보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했기 때문인 것일까, 아니면 사람이 연주하는 음악의 힘 - 악보 밖의 것 - 을 전혀 모르고 있었구나 하는 순간이었다.

세상이 좋아져서 지금은 많은 일을 컴퓨터가 해내고 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한꺼번에 연주해 낼 때의 그 웅장함, 물론 여긴 작/편곡의 훌륭함이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만, 이것은 오직 정말 사람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로구나 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물론, 어찌보면 이것은 박자/피치의 어떤 랜덤 조합이라고 볼 수도 있고, 그런 랜덤한 조합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마치 적당히 damping된 control system들이 무더기로 모여서 서로가 서로에게 수렴해나가는 그런 band of systems로 미래에는 완벽하게 재현을 해낼 수 있을지 몰라도. 그 따위 감정 없는, 자연의 규칙을 그저 모델링한 것들 따위가 흉내내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연주여야겠지.

그런데 실제로 많은 데이터와 행태들을 조합해보면 사람이란 것이 행하는 그 모든 것들이 ‘사람이라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지극히 당연한’ 통계적인 현상, 수학적으로 분석 및 재현이 가능한 세상이 되어가는 게 오히려 더 애석해지는 그런 시절이다. 빅데이터니 AI니 ML이니 하는 것들 말이다. 예전엔 그 인공지능이니 기계학습(machine learning)이란 것들이 한계가 너무 뚜렷했고 사람 수준의 인식 능력, 또 그것을 학습해낸 것을 토대로 합성해내는 능력이란 게 사실 너무나도 뻔했으니까 그러려니 했지만, 그것의 한계가 점점 없어져가고 있다보니 사람이란 존재가 수치적으로 학습 및 합성 가능한 존재로 떨어져버리게 되면서 그 존재 가치라는 것이 에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으로 전락해버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당장에 컴퓨터로 할 수 있는 일들은 수많은 사람들의 허송세월을 모두 다 대체했고, 그 중에서도 제법 지능이 높아야 또 어느 정도 창의적인 능력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일도 수많은 반복/시행착오를 통해 생긴 데이터를 바탕으로 대부분 자동화 되었다. 뭔가 좀 앞서서 내다보는 일을 한다는 사람은 이젠 앞으로 컴퓨터 프로그래머도 전부 인공지능을 대치된다고 하고 있을 정도니까. 그마나도 좀 다행스러운 것은 발주를 내거나 어떤 것의 우열을 가르고 조건을 따지는 일은 아직 사람이 하고 있기에 요구 사항이란 게 늘 다양하고 복잡하고 이성적인 요소외의 감성적인 요소까지 요구하고 있으니 사람이 어쩔 수 없이 개입해야 하는 부분이 제법 많다는 것이다. 지금의 체계라면 사람이 원하는 그 추상적이고도 뭔가 다소 비합리적이지만 그들 나름대로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그러한 요구들은 오직 사람만이 듣고 이해해서 그들이 원하는 것 그대로 만들어줄 수 있으니까 말이다.

만일 브람스의 교향곡 4번이 컴퓨터가 과거의 데이터들을 모두 종합해서 합성해낼 수 있는 그런 음악이라고 하면 그 누가 이것을 진지하게 들을 것인가? 인간이 인간의 고뇌에 의해서 만들어낸 산물이라고 생각하니까 듣는 것 아닐까? 인공지능이 만들어낸 결과가 아무리 완벽하고 너무나도 감동적이다 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인간이 아닌 것에 의해 합성되고 연출된 것이다 라고 하면 어차피 수도 없이 많이 재생산될 수 있는 것이니까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것이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