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학회에 논문을 내봤다..그러나..

연구원 직업을 가진 사람이면 자기 본업 (나 같으면 제품 개발)과 관련된 특허와 논문을 작성해야 하는 의무(?)가 있어서 매년 어느 정도의 할당량이 떨어진다. 그러나 대개 자기 하는 일도 바쁘고 인사상 그다지 플러스 되는 요인도 크지 않기에 (인사 고과에 반영이 된다고는 하나 이 세계도 자로 잰듯하게 평가하고 그런 세계는 못 되다보니) 작성하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다. IPR (Intellectual Property Right)을 만들어 내야 하는 게 주업무인 사람들에겐 물론 특허 작성 비중이 크기 때문에 뭐 어쩔 수 없이 해야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학교를 졸업하고 시간이 좀 지나고 나면 논문 같은 것도 쓰지 못할 정도로 회사에서 시킨 일만 기계적으로 하는 것 같아서 답답할 때가 많아진다. 이를테면 ‘내가 왕년엔 참 똑똑했었는데.. 이런 허접스런 일이나 하면서 늙어가다니 ..’ 혹자들의 경우는 졸업 후에 (나는 엔지니어니까) 수식 쓰는 것 까지 까먹었다는 사람들도 있고, 더러는 공학 수학 계산 자체를 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람들도 있다. 솔직히 말해서 공학용 수학은 공학 전 분야에 대해서 쓰임새가 있을 뿐이지 특정 분야로 깊숙히 파고 들어가게 되면 그 중 극히 일부만을 사용하게 되어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잊혀지게 된다.

어찌되었든, 회사에서 하는 일이 주로 돈 벌이에 관련된 분야에 편중되고, 사실상 수준만 높을 뿐 당장의 돈 벌이에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하는 academic work는 점점 멀어지게 됨으로 인해서, 논문 마저 작성하지 않다보면 얼마되지 않아서 학위를 갖고 있다는 자체가 미안할 정도로 심하게 학력 수준이 저하되는 것을 피할 수가 없다.

따라서, 나와 같은 이론과 실제 사이에서 존재해야만 하는 엔지니어의 경우는 적어도 매년 서너편의 논문은 그것이 실제 회사에서 나의 연구과제와 연관이 있든 없든 작성해줘야 그나마 보잘 것 없는 학력 수준이나마 유지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머리가 썩어가는 것을 조금이나마 늦출 수 있다고 해야할까.

본론으로 들어가서, 정말 바쁜 시간을 쪼개서 열심히 논문을 작성해서 그나마 참여하는 사람들이 꽤 되는 해외 학술 대회에 논문을 그것도 매우 오랜만에 내봤다. 대부분 학술 대회 수준 저하를 막기 위해서 자체적으로 심사 같은 걸 하는데, 이게 사실 순진한 생각에는 똑똑한 교수들이 참여해서 할 것 같지만, 그 많은 논문들을 읽고 있을 정도로 교수들이 한가한 사람들도 아니고, 그것들을 심사했다고 해서 돌아오는 (경제적인) 대가가 거의 없으니 대부분은 학회를 주최하는 학과 교수 연구실, 교수와 인맥이 있는 다른 학교 교수 연구실 석박사과정 학생들이 담당하게 되고, 그나마도 소화가 어려울 때에는 졸업생, 해당 논문에서 refer된 저자들까지 연락해서 심사하게 된다.

그런 까닭에 대부분의 학술대회 심사수준은 상당히 낮은 편이다. 심사 결과라고 날아오는 것을 보면, 지정된 심사자가 귀찮아서 심사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심사했다고 하더라도 그 논문을 읽고 이해할 수준의 학력이 되지 못해서 포기한다거나 엉터리로 평가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자신이 이해할 수준이 되지 못해 미안하다고 답이 오는 경우도 있다. 물론 논문 자체의 가치가 꽤 있어도 이런 심사자를 만나는 경우에는 reject 당할 확률은 매우 높아진다.

그러나, 어느 정도 수준을 갖춘, 다시말해 주최하는 학교의 교수가 해당 분야 대가인 경우는 상황이 달라서 상당히 꼼꼼히 챙겨주고 매우 만족스런 심사결과를 되돌려 줄 때도 있다.

아..그러나 이번 경우는 사실 인지도라든가 수준은 그리 높지 않은 학회지만 개최지가 몹시 끌리는 이유로 희망을 걸고 내본 것인데, 예상대로 네명의 심사자 중 두명은 심사를 포기했고, 한명은 아무런 코맨트 없이 전분야에 걸쳐 매우 높은 점수를 주고, 나머지 하난 하나는 읽기 어렵다 (쉽게 말해 몬소린지 모르겠다) 며 어이없는 점수를 줘버렸다. 세번째 심사자 덕택에 reject를 간신히 면한 꼴이라고나 해야 할까?

글쎄 내가 그 동안 나 홀로 세계에서 너무 오랫동안 갇혀 살았기 때문일까..아니면 나의 학력 수준이 너무나 높아진 까닭에 범재(凡材)가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학문을 논했기 때문일까? 아 골치 아프다..어쨋거나 후자일 확률은 그리 높지 않다.

이 작자의 맛 가는 코멘트가 가슴에 불을 지핀 까닭에, 이 여세를 몰아 학회지 논문까지 그냥 내볼까 한다. 기왕이면 한 편 더 쓸까보다. 다홍치마라고 내년에 라스베가스에서 열리는 신호처리 학회에 주제를 맞춰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