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공관 모델링에 대한 잡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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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관의 경우 제조사라든가 제조년 또는 같은 형번이라도 제작 시리얼넘버 같은 것들로 구별해서 특별히 값을 더 쳐주거나 명품 취급을 하는 경우가 있다. 내가 아는 경우 중 하나가 Telefunken의 각인관이라고 불리우는 명품 ‘관’의 경우이다. 텔레풍켄이라는 독일의 전자회사에서 오래전에 생산된 관인데 내가 아는 바로 중국이나 러시아에서 생산되는 관과 완전히 차별화해서 비싸게 팔리는 관이다. 핀이 나와있는 곳을 보면 별도로 사각형의 각인이 되어있다고 해서 각인이 된 관이라고 불린다. image 진공관이라는게 여러 가지 특징이 있지만 마이크로포닉 특성이 있다거나 잡음이 좀 많다 싶으면 저질관으로 취급을 당한다. 여기서 마이크로포닉 특성이라 함은 진공관 내부의 부품들이 잘 고정되어있지 않아서 진동을 주면 그것이 그대로 전류 흐름에 영향을 미쳐 마이크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뜻 되시겠다.진공관을 수치적으로 모델링하면 이 마이크로 포닉 특성이라든가 잡음 특성은 모델하지 않는다. 단지 grid-cathode current와 plate-cathode current만 모델하기 때문에 안좋은 특성은 다 빠져버리는 셈이니 좋긴 하지만, 사실상 비현실적인 진공관이 되는 셈이다.수치적으로 텔레풍켄관은 다른 관과 얼마나 다른지 아래 링크의 ECC83의 datasheet를 찾아보았다.http://www.drtube.com/datasheets/ecc83-telefunken1954.pdf특별히 고급관으로 인정받는 관이라고 해서 별로 다른 것은 없었다. 제조사의 datasheet이지만 실제의 측정 값을 기록한 것인지 잘 알 수 없는 plate-cathode voltage에 따른 plate current에 대한 곡선들이 나와있고, grid current에 대한 것은 Vg(max)라고 해서 grid current가 0.3 uA가 될 때의 voltage만 나와있다. 별도로 측정값으로 그려놓은 grid current curve는 없다. 측정 값에 기반한 grid/plate current curve가 있으면 다른 관과 어느 정도 차별성이 있는지 확인하기도 좋고 모델링하기에도 좋을텐데 말이다.실제로 진공관을 모델할 때 필요한 정보는 이것이 전부다. parasitic capacitance도 중요한 값이긴 하지만, 하이파이 세계에서 parasitic capacitance는 없는 것이 더 좋고, 기타 앰프를 생각하면 hiss noise라든가 발진확률을 줄여주니까 값이 약간 더 크면 좋지 않을까 한다만.즉, 입력 전압에 대한 전류특성. 진공관이 좋은 것은 진공관의 hifi 특성이 아니라 진공관이 주는 왜곡이기 때문에 어떤 관이 특별히 좋다는 것은 그 관이 가져다주는 특별한 왜곡이 좋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시간이 되면 진공관의 증폭특성에 대해서 언급하면 이해하겠지만 전기적 특성은 요새의 반도체 앰프들에 비하면 정말로 좋지 못하다. 그렇지만 이런 왜곡을 얻기 위해 많은 돈을 들인다고 하면 다소 아이러니하지만 실제로 그렇다. (전압을 100배 가까이 증폭하자고 개당 만원이 넘는 진공관 또 진공관을 덥히는 불필요한 회로와 전력 낭비를 생각하면 몇 십원짜리 TR을 쓰는게 훨씬 더 싸고, 아예 프리앰프 전체를 그런 TR을 잔뜩 집적해서 칼같은 정확도로 증폭해주는 소매가 백원도 안하는 opamp로 대체하는 것이야 말로 엄청난 저전력 저비용 솔루션이다.) 여하튼 그런 왜곡 특성이 좋아서 구입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에 비해 공급이 많지 않으니 그런 시장 가격이 형성된 것이겠지. 또 그러한 왜곡 특성이 진공관 제조사, 제조일자, 생산 번호에 따라 다르니 그에 따른 프리미엄이 붙는 것일테고.따라서, 시장에서 각광받았던 제조사별 진공관의 plate-cathode current, grid current 특성을 모두 수치화해서 그것을 정확히 모델링한다면 (회로를 시뮬하는 일은 완벽에 가까운 수준에 이르렀으니) 비록 저가의 대량생산 이미지가 강하게 박혀버린 디지털이지만 과거 아날로그의 향수의 젖는 이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물론, 이것에는 주관적인 요소가 강해서 블라인드 테스트를 하면 생뚱맞은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만.내 경우만 떠올리더라도 디지털 세계는 차갑다며 CD까지 한동안 멀리 하시던 아버지 세대에서는 아직도 진공관의 따스함을 찾으려 한다. 그것이 왜 따뜻한가 심지어 서구 세계의 언어로도 warm하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해보면, 실제로 full range라고 하지만 성능이 떨어져 저음과 고음이 많이 날아간 그런 소리, 왠지 먼지 앉은 축음기의 혼(horn)에서나 나올 법한 low-fi한 소릴 말하는 게 아닐까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 세대에서는 감수성이 예민한 시절 어설픈 아날로그 세계를 경험하시고 얼마 되지 않아 급격히 디지털 세계의 등장 및 기술 포화를 경험하셨을테니까.디지털 세계에서 아날로그 세계를 말그대로 copy해서 가지고 들어오는 것은, 디지털 세계가 갖추고 있는 엄격함이라든가 철저한 trade-off에 의한 완벽히 맞아떨어짐을 깨고, 어떻게하면 불완전하고 어설픈 세계를 얼마나 그럴싸하게 흉내낼까 하는 것이라고 난 생각한다. 웃기는 일이지만 정말로 디지털 세계에서 바라보는 아날로그 세계는 왠지 어설프고 모잘라 보인다. 그런데 그러한 성질이 귀를 즐겁게 하고 감흥을 돋군다. 이렇게 비유하면 맞을지 모르겠지만, 디지털 사진기로 보이는 그대로 찍을 수 있는 광경을 일부러 수채화 물감으로 그려서 남겨놓는 그런 기분이랄까? 더 나아가면 디지털 사진기로 광경을 찍어놓고 일부러 수채화 기분이나게 만들어주는 필터를 적용하는 경우라고나 할까?아무리 아날로그 세계를 잘 가져다 베꼈다고 자랑질하는 제품들을 써봐도 실물로 존재하는 아날로그 세계의 감동에 미치지 못한다. 이 역시도 디지털 사운드에 lo-fi filtering한 결과물을 듣고 아무런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하면 좀 심한 비약일지 모르겠지만. 왜 이처럼 좋은 세상에 어설프고 모자라보이는 아날로그 세계도 잘 가져다 베끼지 못하느냐 하면 아직도 댈 수 있는 핑계는 참 많다. 그런 핑계들에 대해서 일면 동의하는 바 있지만, 막상 들여다보면 아직도 게을러서 빼먹고 제대로 못 베낀다거나 베끼더라도 열심히 베끼지 않는 면도 많아 보인다.내 결론은 이렇다. 너무나도 정직하고 정확함을 추구하는 디지털 세계가 여태까지는 사람에게 엄청난 편리함과 높은 생산성을 가져다 주었지만, 그에 반해 정서적인 측면으로 그만큼 큰 감동을 주지 못했다면, 앞으로는 아날로그 세계를 더욱 더 정교하게 흉내내고 그것을 바탕으로 인간에게 즐거움과 감동을 가져다주는 요소를 ‘최적화’함으로써 아날로그 세계가 가져다 주었던 감동과 즐거움 보다 더 큰 것을 가져다 줄 수 있지 않을까 한다.———읽는 것 귀찮아하는 분들을 위한 요약: 1. 진공관의 특성은 전기적으로 봤을 때 크게 grid/cathode voltage에 따른 plate current의 곡선과 parasitic capacitance로 볼 수 있다. 그런데 값 비싼 관이라고 해서 값싼 관 대비 이 특성이 다르지는 않다. 즉, 비싼 관과 그렇지 않은 관의 차이는 이 특성에 포함되지 않은 관의 ‘물리적’ 특성: 마이크로 포닉 특성/잡음 특성 등등을 종합해서 봤을 때 생긴다. 1. 아날로그 세계에 존재하는 진공관을 그것의 전기적 특성만을 가져다가 디지털 세계에서 모델링 할 때에는 관의 메이커가 어떠하냐에 따른 차이점은 드러내기 힘들다. 모델링 한다는 자체가 디지털 세계에서 아날로그 세계의 어설픔을 가져다 주는 일이라 모델링 하는 입장에서는 선택의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아날로그 세계의 어설픔을 디지털 세계에 가져오는 일 자체가 불필요하게 복잡한 계산을 요구하는 일이기 때문에, 과연 이렇게 하는 것이 꼭 필요한 일인가 아니면 할 필요가 없는 일이냐를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1. 이렇게 디지털 세계에 불완전함/어설픔을 넣어주는 일이 아날로그 세계에서 맛 본 감동을 디지털 세계에서 재현하게 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작업 역시 의미가 있는 일로 여겨져야 하고, 또 그것이 일종의 ‘명품 디지털 기술’로 잘 발돋움 할 수 있도록 모델링/최적화에 대한 연구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이미 오디오 시장은 거의 죽은 거나 다름 없는 상황이고, 값비싼 오디오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자랑이 되는 시대는 확실히 오래전에 끝나버린 듯 하다. 진공관을 모델링하는 일도 이제 전기 기타와 관련된 영역을 벗어나면 그다지 열심이지도 않고, 이런 일은 왜하고 있나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