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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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길게 적어보았는데, 적어내려가다 보니 기성 종교 흠집내기로 흐르는 것 같아 전부 지우고 새로 적는다.
사람이 ‘제대로’ 살려면 어떻게 되어야 하나 오랫동안 고민하고 있다. 사회에서 악으로 생각하는 것들만 저지르지 않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 그것이 제대로 사는 삶인 것일까? 이것은 이미 사회에 있는 법으로 개개인에게 일정 수준의 제한을 두는 것으로 대개의 사람들은 이러한 짓을 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제대로 살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의문을 던지기도 하고, 답을 얻지 못해서 온라인 게시판을 기웃거리며 묻기도 하고, 종교를 통해 그 의문을 해결하려고도 하고 더러는 다른 감정적/정신적인 문제와 함께 신음하고 있기도 한 것 같다.
혹자의 얘길 들어보면 인생의 의미라는 것이 없다고 한다. 사람이 생명을 얻은 것이 그 스스로의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 낳아주었기 때문에 생명을 갖고 살게 된 것이므로, 그것에 대한 특별한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내가 아닌 누군가의 의지로 나를 낳아 주었기 때문에 태어났으니 나는 그냥 살아갈 뿐이란다. 또는 누군가가 나의 큰 쓰임을 미리 계획하여 이 세상의 빛을 보게 한 것이니 죽을 때까지 내가 가야할 길을 알고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이라고도 한다.
이렇게 적어놓고 보니 인간은 자신이 왜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는지에 대한 것도 잘 모른 채 그냥 살아가고 있는 것이로구나 하게 된다. 또 누구에게나 이 문제는 어려운 것이니 종교별로 제시해놓은 삶의 의미와 삶의 여정을 택해서 살기도 하고, 평생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고 살다가 죽기도 한다.
그래도 적어도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인간인 이상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세상의 중심이 되고, 그 기준으로 살아가다보니 난 좀 특별한 존재일 것 같고 그러한 존재인 이상 뭔가 특수한 사명을 가지고 태어났을 것 같고 그랬다면 분명히 내가 가야할 길도 있고 그 길을 온전히 갈 수 있도록 누군가의 도움을 받게 될 것이라는 생각도 하게 될 것 같다. 그래서 그 요구사항에 부합하는 이론을 담은 종교가 번성하게 되고, 여기에 덤으로 죽어도 죽지 않는 생명까지 덤으로 준다고 하면 이보다 더 좋은 종교가 없을 것이다. 더구나 이러한 사실을 믿게 되는 것이야 말로 ‘선택된 존재’이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아쉽게도 선택받지 못한 존재들이 된다니 이 얼마나 엄청난 은혜인 것인가?
그저 한갗 동물로 태어났다면 자연에 널려있는 자양분들을 먹고 자라다가 때가 되면 어딘가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는 것으로 만족할텐데, 그렇지 못하니 살아있는 동안 무엇이 되어야 하고 뭔가를 이뤄놓아야겠기에 힘든 여정을 마다않고 살아가지 않는 것일까? 힘든 여정 속에서 사실상 다른 사람들이 정해놓은 허울 뿐인 뭔가가 되려고 애쓰고, 되지 못한 이들은 괴로워하고, 뭔가가 된 이후에는 또 다른 무엇인가가 되려고 애쓰고, 또 되지 못해 괴로워하는 무한 루프에 빠져지내다가 어느 날 이 모든 것이 허무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쯤엔 평온히 살다가 생을 마감하길 바라며 숨을 거두게 되는 것이지 싶다. 또 많은 수는 뭔가가 되려는 몸부림 속에서 숨을 거두는 이들도 많고, 또 더러는 태어나기도 전에, 더러는 태어나는 도중에, 더러는 자라는 동안에도 숨을 거두고, 이러한 여정을 견뎌내기 어려워서 스스로 숨을 거두는 이들도 많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무엇인가가 되어야겠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참으로 어려운 일인 것 같다. 과거에는 먹고 살기 힘들어서 생존에 목표를 둔 무엇인가가 되려했고, 생존의 조건에 떠밀려 되려 하지 않았던 것이 되기도 했다면, 먹고 사는 문제가 예전보다 많이 좋아진 지금에는 나를 낳아준 누군가의 의지에 의하여 뭔가 되려하는 이들이 많고, 또 엄청난 경쟁 속에서 살아남으려 하다보니 선택된 소수를 뺀 나머지는 그들의 의지와든 다른 무엇인가가 되어있어야 하고, 그렇게도 뭔가가 되지 못한 이들은 한숨 속에 아무것도 되지 못한 상태로 살아가고 있다. 또 개인적인 필요와 의지에서가 아니라 대중에게 비춰지는 모양새의 삶을 이루고 유지하기 위해서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고 또 그렇게 이룬 가정을 지켜내기 위해 신음하며 사는 이들도 있고 더러는 지켜내지 못해서 괴로워하는 사람들도 있고, 힘써 이룬 가정이 깨어져 흩어져 사는 사람들, 또 다시 새로운 가정을 이뤄내는 사람들, 또 이 이뤄내고 흩어지는 과정을 반복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다.
이렇게 해서 세상에 새로운 생명을 공급한 이들은 태어난 생명을 온전한 무엇인가로 키워내기 위해 애쓰고 이들이 어느 정도 자라난 이후에는, 이들에게 과학기술과 의학의 발전이 가져다 준 늘어난 생을 더 살아내기 위해 또 부단히 벌어야 하고 인간에게 어쩔 수 없이 주어진 노화를 거스르기 위해 끊임없이 애를 쓰면서 산다. 또 이러한 조건이 미치지 못하는 이들은 자신의 생을 비관하여 스스로 숨을 거두고 다른 이들의 생과 늘 비교하며 상처입고 괴로워하며 숨을 거두기도 하고 더러는 다양한 정신 승리를 통해서 악착같이 살아나가고 있다.
이런 문제들을 단편적으로 생각하면 인생은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또 사람의 머리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처럼 보인다. 하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생을 한곳으로 모아놓고 보면, 천장위에 매달려있는 무엇인지 모를 것을 찾아 중력을 거슬러 끊임없이 기어올라가는 개미 떼를 연상하게 된다.
관찰자의 입장에서 이들 개미들이 이러한 삶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특별히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이들 개미는 끝이 어딘지 모를 천장에는 뭔가 내가 원하는 것이 있을 것이란 사실만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취할 때까지 끊임없이 오르고 있을 뿐이구나 하는 것이다. 오르고 있는 개미가 그 여정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전혀 알 수 없지만, 앞서가는 개미들이 그렇다고 해준 것만 믿고 있을 뿐이다.
이 개미 떼를 들여다보고 있는 관찰자의 입장에서는 이 많은 개미들 중에 어떤 무리는 선택받고 어떤 무리는 선택받지 않았다라든가, 어떤 개미는 특별하다거나 특별하지 않다라거나 할 수 있을까? 그저 엄청나게 희박한 확률로 빨리 기어오른 개미들을 보면 그들이 해왔을 수많은 결정들이 중도 포기하지 않고 최종적으로 목표에 도달하는 결정이 되었을 뿐인 것이지, 그러한 결정을 선택한 개미가 누군가로부터 선택받았다 할 수는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물론 주변환경이란 변수가 있고 관찰자가 이들의 여정에 개입해서 바닥에 있는 개미를 천정까지 끌어올려 줄 수도 있다. 그 어느 누구도 이들의 여정이 어떠해야 한다는 조건을 결정하지도 않았고 제한을 두지도 않는다. 그저 우연히 주어진 조건에서 바닥에서 끝까지 기어올라갈 뿐이다.
수많은 인간들의 삶의 모습은 대략적으로 보기에 이 개미떼의 모습과 다르지 않아보인다. 힘든 여정을 가고 있는 개미의 입장에서는 무엇인지 모를 절대자가 개입하여 자신만은 보다 특별한 지름길로 보내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위로 오르는 여정에서 불행하게도 아래로 추락하는 다른 개미들 처럼 되지 않기를 바랄 수 밖에 없는 것이고 그 와중에서 여러 번 바닥에서 위로 오르는 여정을 재시도 한 개미들도 있을 수 밖에 없다. 또 엄청난 행운으로 큰 힘을 들이지 않고 빨리 오르는 개미들도 있을 수 있다.
관찰자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면 이들의 모습은 불교에서 바라보는 불쌍한 중생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그들이 죽고나면 무의미해질 무엇인지 모를 것을 얻으려 하는 것이나 무엇인지 모를 어떤 경지에 다다르기 위해 그 자신의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그냥 기어오르는 것일 뿐이다. 앞서 오르고 있는 이를 부러워하고 뒤를 따라 오르고 있는 이들을 바라보며 위안을 삼고 무엇인지도 모르는 어딘가로 중력을 거슬러 끊임없이 오르는 것이다. 그저 나보다 앞서 길을 가고 있는 이들이 더 나은 위치에 있을 거라 막연히 생각할 뿐이다. 불행히도 이 과정에서는 어떤 존재가 개입하여 선택된 개미들만 무중력 상태로 만들어준다거나 중력을 역으로 걸어서 아무 수고도 들이지 않고 목적지로 보내준다거나 하지 않는다. 그저 위로 오르는 과정 중에서 스스로 오래도록 고민해본 끝에 스스로가 관찰자의 위치에 서게 되는 경우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확률/통계의 개념으로는 같은 종의 개미가 가지고 있는 능력에는 큰 차이가 없을 것이고 일부는 뒤쳐질 수 밖에 없고 또 일부는 앞서 가더라도 그 편차는 크지 않을 거란 것이다. 더구나 앞서가거나 뒷쳐져있다는 그것 역시 관찰자의 입장에서 보면 모두 무의미한 것이다. 그저 왜 저렇게 힘든 여정을 마다하지 않고 생을 다해 매달려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뿐이다. 더구나 이러한 시스템이 깨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유지되고 있는 것 또한 신기할 뿐이다. 그들의 최종 목적지에서 그들에게 주어질 ‘보상’이란 것의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 것이기에 이 노력을 마다하지 않고 있는지 놀라울 뿐인 것이다. 과연 그 보상이 그들의 온 생을 다 바쳐도 전혀 아깝지 않을 그런 것인지 아닌지 말이다.
갑자기 드는 생각은 엄청난 속도의 레이스를 벌이는 이들에게 과연 ‘그랑프리’라는 것이 그들의 생명의 위협을 감수하면서도 얻어내야 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물론 모든 이들이 그랑프리를 얻기 위해 죽음을 감수하진 않지만 말이다. 인간이란 누군가의 눈에는 가치없어보이는 것에도 그들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짓을 잘도 하는 존재인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고, 과연 그것이 짧다면 짧고 또 길다면 긴 인생살이에 무슨 도움이 되는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든다.
종교에 심취한 이들도 이와 같은 노력을 평생토록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들 역시도 타인들의 눈에는 엄청난 가치의 것들을 모두 포기한 채 ‘절대자’에 가까와지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 이들이다. 저마다가 목표로 하고 있는 것들은 저마다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놓을 수 없는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지고 있기에 그러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평범한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서 남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환경에서 자라난 지극히 평범한 나와 같은 존재에게 일생을 통해 도달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도달해야 할 목표자체가 없는 것인가? 한 인간으로서 어느 시점에 이르면 그가 그동안 추구해왔던 것이 그저 허상이었다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 인간에게는 삶의 목표가 없어진 것이므로 더 이상의 삶이 무의미 해지는 것인가? 애초부터 궁극의 삶의 지향점을 깨닫지 못한 것이야 말로 이 인간에게는 얼마나 불행한 일인 것인가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그렇다면 이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치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더구나 종교라는 것이 주는 삶의 지향점이라는 것은 종교마다 다 다르고 접근 방법 또한 다르다. 인간이 가진 인지 능력이란 것이 유한하기에 - 도달 지점에서 주어지는 ‘보상’이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며 기어올라가는 개미처럼 - 어느 종교가 내가 도달하게 될 최종목적지가 무엇인지 하는 답을 주게 될지 모르는 것이다. A라는 종교가 옳다고 하면 그런가 보다 하고, B 종교가 이것이다 하면 또 그런가 보다하는 것이다. 아니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혹은 A만이 나의 이 허무하고 기나긴 인생 여정에 보람이 될만한 무엇인가를 줄 것이다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들을 강하게 옭아맬 수 있는 것은 살아있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육신의 죽음 이후에 목적지를 심어두는 것일 뿐이다.
어떤 종교는 살아가면서 내가 어느 수준 이상의 스코어를 기록하지 못하면 목표 스코어에 도달하게 될 때까지 무한히 반복해야 한다고도 하고, 어떤 종교는 일생을 두고 노력하면 나의 노력을 인정해서 죽은 후에 엄청난 보상이 따르게 된다고도 하고, 어떤 종교는 어떤 절대자가 그 어떤 누구도 그 절대자의 존재를 믿기만하면 그 스스로가 이루어놓은 공로를 통해서 보상을 받게 해준다고도 한다.
죽음 이후를 알 수 없는 지극히 무지한 존재의 입장에서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생명을 받아서 이 땅에 태어난 존재는 스스로의 의지로 특별한 목표를 스스로에게 부여하고 태어나지 않은 이상, 저마다의 생이 다할 때까지 그들 스스로가 추구하는 바를 찾아서 가는 것 말고는 답이 없는 것이다. 그것이 절대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든 아니면 허상이 되든 말이다.
내가 아닌 타인들도 나와 마찬가지 이유로 이 세상에 태어났을 뿐이다. 태어난 것이 절대적인 입장에서 엄청난 축복을 받은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아는 개념의 지옥의 무한 루프를 돌고 있는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으니 나나 그들이나 불쌍하기는 매한가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