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만복을 뒤늦게 정주행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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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내각의 모토가 일본의 부흥 (재기?) 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드라마 만복은 그러한 의도를 반영하기 위해서 나온 드라마가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드라마의 주인공인 후쿠코(복자)와 만페이(만평) 부부가 일본의 부흥을 가져다 줄 인간상의 모델로 나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쉽게 말해서 그 모든 risk를 다 끌어안고도 자신의 이상을 펼치려하는 일본식 프론티어인 만페이와 그러한 만페이의 모든 risk를 같이 떠앉는 후쿠코 부부.
일본이 세계 경제의 원탑으로 명성을 떨친 이후로 세상이 여러 번 변했는데, 그동안 사실 일본은 그동안 일본이 쌓아온 명성에 걸맞는 성공을 이룬 것이 하나도 없다 시피했지 싶다. 그러한 성공은 한국, 그리고 중국으로 이어지고 이젠 그것이 베트남으로까지 가고 있는 듯 한데, 그런 걸 보면 개척자 정신이며 기업가 정신이란 것이 웬만큼 먹고 살게 되면 도무지 나올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한국도 벌써 헬조선이니 금수저 흙수저 이야기가 만연해 있는 것을 보면 도전해보기도 전에 미리 패배주의에 사로 잡혀있고 오히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을 구닥다리 취급하고 있는 실정이고 다들 구닥다리니 틀딱이니 소리 듣기 싫으니 아무 말 안하고 입 다물고 있는 게 아닌가 한다. 사실 40대 이후의 사람들은 한국의 경제성장의 혜택을 입고 자랐고 그래서 적어도 자기 집 한 채 정도는 가지고 살고 있지 않은가. 그동안 미친 듯 올라버린 부동산 거품이며 물가 때문에 또 불공평한 부의 분배 때문에 20-30대는 패배주의에 사로잡혀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데, 그마저도 내 입장에선 덜 배고프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분명히 아시아의 다른 개발도상국 미개발국가에 사는 사람들이 더 힘들게 살고 있고 먹고 살기 힘들지만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바라보는 입장은 그곳에 아직 캐내지 않은 잠재력이 있다고 본다. 흔히 값싼 노동력을 착휘해 먹을 껀덕지가 그곳에 더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겠지만, 그들이 어느 정도 경제력을 갖추게 되면 갖게 될 막대한 수요 때문이기도 하다. 이미 다 커 버린 나라에선 더 이상 아무런 가능성이 없다고 해야할까? 오히려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요건이 구비된 것은 아니고?
이 드라마를 보면 드라마가 낙관적인 희망론에 치닫게 되지 않게 하기 위함인지 수시로 부정적인 의견을 내뱉는 사람이 있다. 또 그렇게 부정적으로 이야기가 흘러가게도 된다. 하지만 결국에 극복하게 된다는 것이, 즉 ‘살아있다면 어떻게든 되게 되어있다’란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아무것도 될 수 없을 거야’ 하면서 리스크를 회피하는 것은 뭔가 잘될 확률도 0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리스크는 절대로 떠앉지 않으면서 대박을 꿈꾸는 것은 복권이 당첨되길 바라는 것 보다 더 허황된 것이다.
어차피 삶의 시계는 돌아간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아니면 될지 안될지 모르는 무엇인가에 희망을 걸고 비록 엄청난 리스크를 떠안고 바쁘게 뛰어다녀도 말이다. 그러나 그 결과의 차이는 매우 크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자포자기 하면서 살아가면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지만 (그래서 ‘우울뽕’에 쩔어사는 삶을 살게 되지만), 바쁘게 뭔가 하면서 희망을 갖고 사는 삶은 그 삶의 성공 여부를 떠나서 적어도 ‘희망뽕’에 쩔어서라도 즐겁게 살다 갈 수 있다는 것이다.
가늘고 길게, 굵고 짧게의 차이점은 실로 크다고 본다. 가늘고 길게 가지만 그게 희망없음에 의한 우울에 점철된 삶이라면 지옥이 따로 없는 것이다. 비록 짧다 살게 가더라도 밝은 미래에 대한 강렬한 희망을 갖고 사는 삶이 차라리 나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