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성 우울

이곳은 대개 1-2월엔 비도 오는 편이지만 날씨가 그다지 좋지 못하다. 비가 오지 않는 날도 흐려있는 경우가 많다. 1-2월 그렇게 안 좋은 날씨 잠깐 보면 그만이란 것에 희망을 걸고 지낼 정도로.

이렇게 먹구름이 잔뜩 드리우고 있으면 일조량이 줄어 기온도 떨어지고 온 세상의 채도가 급격히 떨어져서 흑백 영화를 보고 있는 기분까지 든다. 그러니까 음침하고 불쾌한 기분이 짓누르는 그런 느낌이다.

그랬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갑자기 활짝 개어 눈부신 한낯의 새파란 하늘을 보면 다시 기운이 솟아나는 느낌을 받고 말이다.

이렇게 날씨가 좋지 않을 때 우울한 기분을 갖는 것을 계절성 우울 (seasonal depression)이라고 한단다. 계절성 알레르기(알러지/앨러지..)가 있듯 말이다.

우울함과 평생 친구로 지낸 입장에서 난 우울함을 나 자신과 나의 인생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깨닫으면서 오는 망상/착각의 깨어짐이라고 생각한다.

특별한 존재로 태어나서 그렇게 자라지지 않은 한, 또 매우 희박한 확률로 좋은 운을 타고 나지 않은 이상엔 이 세상 대부분의 사람은 사실 별 볼 일이 없는 존재로 살아가다가 죽게 된다. 그 사람의 삶이란 것은 엄밀히 따져봤을 때 지극히 비루한 삶일 수 밖에 없다. 일평생 그것을 부정하려 하거나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몸부림 친다든가 애써 부정하거나 신경쓰려하지 않을 뿐이지, 그 사람과 그 사람의 삶이라는 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냥 평범한 인간의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서 일평생 굶어죽지 않기 위해 투쟁하다가 기운 빠지면 그렇게 죽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단지 이런 삶에서 어떤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 ‘나만의…‘를 찾을 뿐이다. 나만의 반려자를 찾고 그렇게 나만의 가족을 이루고. 자신의 유전자를 받거나 자신과 오랜 시간을 같이 한다고 해서 그들이 나와 같은, 그들과 나를 동일시 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법적으로도 서로 독립적인 존재일 뿐더러 더 이상의 이해관계가 성립되지 않으면 다 무의미해지는 것이다.

내 삶과 내 자신과 관련된 이런 저런 것들을 일반적인 상식으로 생각해보면 그 비루함에 우울해질 수 밖에 없다. 그 미약함을 자각할 수록 한심해질 뿐이다. 그래서 절대자를 찾아서 제발 자신의 바램대로 되게 해달라고 그 욕구를 분출시킨다. 그 분이 들어주실 거라는 착각에 취해 살든가, 매주 아니 매일 그렇게 누군가 끊임없이 날 착각시키는 사람을 만나러 다니면서 나만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는 그 삶의 비루함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어할 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제발 탈출했다고 스스로 믿어지기만을 희망할, 아니 그렇게 될 거라고 믿고 있다고 우기고 있을 뿐.

누군가 그렇게 이야기한다. 우울증에서 벗어나려면 아무리 말도 안되는 거라도 일단 살아야 할 의미를 만들어 보라고. 그 누군가의 인정 따윈 필요없으니까.

인간들이 살아가면서 하고 있는 모든 행동들이 다 그 자신과 그 자신의 삶의 비루함에 대한 생각을 떨쳐내기 위해서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때론 참 가엽다는 생각까지 든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인간과 인간의 삶이란 게 맨정신으로 볼 때 비루하고 모순되고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로 되어있다. 그래도 그렇게라도 해야 살아갈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 매일 아침 눈 뜨는 순간이 즐겁다면,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유치하고’, ‘바보같고’ 그 따위 말들은 다 필요 없다.

그냥 살자. 의미 따위 생각할 겨를 없다. 단 일분의 시간이라도 흥미진진하고 즐거운 시간으로 흐르게 만들었다면 ‘참 잘했어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