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린 협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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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슨 세계 3대, 5대 XXX 해서 랭킹을 먹인다거나 딱 꼬집어서 3개만 혹 5개만 엄청 좋다 이야기하는 걸 싫어한다. 대개 이런 경우 이 글을 쓴 사람이 딱 3개 혹은 5개 밖에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라 본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아니 그의 1/4, 1/10이라도 잘 봤다면 함부로 그런 소릴 할 수 없을텐데 하지만.

그런데, 이렇게 하면 제목 장사도 되고, 그냥 ‘이거 3개만 마스터하면 어디 가서 아는 척할 수 있는 것인가? 혹은 이해하지 못할 것은 없는 건가?’ 싶은 겉핥기만 하고 싶은 사람들에겐 나름 아예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것 보단 약간 더 나으니까 그런 의미에서는 나름 의미는 있다고 본다만.

바이올린 협주곡들은 (다른 교향곡들처럼)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부터 쥐뿔 모르지만 이것 저것 열심히 들어왔고, 얼마전엔 아직도 혈기왕성하신 안느 소피 무터의 공연까지 열심히 찾아가서 봤던 경험으로 할 수 있는 말은, 3대니 5대니 다 의미없다는 것이다. 어느 날은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듣고 싶고 어느 날은 막스 브루흐의 어느 날은 말러, 어떤 날은 쇤버그의 협주곡을 듣고 싶고 그런 것이다. 많이 들어두면 그날 그날의 선호도에 따라 다양한 곡을 선택하여 들을 수 있는 것이지, 세계 3대, 5대 이 따위 것에 휘둘린다면 나의 선택의 폭을 줄이게 될 뿐이다. 뭐 그런 것에 휘둘리는 분들이 다른 좋은 것들 놔두고 바이올린 협주곡을 들을 확률도 희박하다고 본다만.

이런 꼰대스러운 ㄱ소리를 계속 늘어놓는 것은 그만큼 바이올린 협주곡이란 것이 듣기에 참 좋기 때문이다.

‘좋아! 이거 정말 좋아!’

듣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내 마음이 치유됨을 느낀다. 아니 기억속에 있는 그 음악들이 내 머리 안에서 재생되고 있는 것 그 자체로도 치유가 되는 느낌이다. 그런데 치유되는 그 조건이 각기 다 다르기 때문에 많이 들어둘 수록 유리하단 것이다. 특히나 그 음악들을 재생하면서 그 음악을 들었을 때 보았던 음반의 커버들을 떠올리면 내가 그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의 감동, 또 연주자들이 녹음 당시, 또 사진 촬영 당시 어떠한 심정이었을까 수박 겉핥기나마 느낄 수 있으니까 더욱 그러하다.

소녀 시절 당대 최고의 악단으로 여겨졌던 베를린 필하모닉과 협연하는 안느 소피 무터의 그 엄청난 긴장감은 어떠했을까, 또 신예 거물급 뮤지션으로 막 등극했던 시절의 이착펄만의 애띤 모습과 한창 어린 젊은 친구와 협연하는 유진 올먼디의 그 느낌을 어렴풋이나마 느껴볼 수 있는 것이다.

그만큼 그들에게 그런 녹음 하나하나는 정말 중요했고, 지나고 돌이켜 보면 지휘자에게도 동일한 곡을 여러 번 녹음하는 일이 드문 나머지 그들에게는 그 곡 하나하나가 얼마나 소중했을까 느끼게 된다.

특히나 당대 최고의 연주자들과 협연을 할 수 있었던 악단과 지휘자는 여러 가지 이유로 흔치 않았을테니까 그들에게 협연할 수 있다는 그 시간이란 게 얼마나 값지고 소중했을지 미루어 짐작할만 하다. 물론, 매일 매일 똑같이 살아가고 있는 게 서러운 나의 하루하루 1분 1초도 그만큼 소중하겠지만.

아쉽게도 어릴 시절 듣던 연주들 일부는 지금은 아마존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들이 많아졌다. 다 같은 XXX의 바이올린 협주곡인데 누가 연주하든 다 같은 것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그들의 연주를 듣고 가슴속으로 수도 없이 감동했을 수많은 이들에겐 매우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