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팬대믹이 나에게 가져다 준 것..

백신 보급이 빨라지면서 이제 이 앓던 이 같은 팬대믹도 거의 다 끝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부활절을 맞아서 관광지는 사람으로 터져나간다는 뉴스가 뜨기도 하고 지인이 왈 여행지 렌터카가 공급이 부족해서 하루 렌트하는 자동차에 지불하는 돈이 100불이 넘어가는 지경이 되었다는 얘기도 듣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어제 아무 생각없이 머리를 깎다가 생각난 것이다.

과연 1년이 넘어가고 있는 이 팬대믹이 나에게 가져다 준 게 무엇일까?

내가 나를 더 잘 이해하게 된 것과 셀프 이발 기술이다.

어차피 갇혀 살다보면 매일 더 자주 쳐다보게 되는 것은 내 자신이고, 나를 관리하고 나를 먹이는 것도 나니까. 그래서 나와 같이 살다보면 나란 존재는 한없이 무력하고 한없이 무능하고 그런 존재에 불과하고 특히나 정신적인 면으로 보면 지극히 미숙하기 짝이 없는데, 어떻게 하면 내가 화가 나는지 어떻게 하면 기분이 좋아지는지 점점 익숙해져가고 있다. 그렇게 내가 나의 비위를 맞출 수 있을까, 나를 편하게 상대할 수 있는가 하는 기술을 점점 더 터득하게 되는 것이다. 정말 너무나도 당연히 터득했어야 할 기술인데 왜 여태 모르고 살아왔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머리 자르는 기술은 이게 잘못 이해하면 1년 내내 머리 깎는 기술을 익혔다, 혹은 돈주고 깎는 것에 거의 비슷한 수준의 헤어컷 기술을 익혔다고 읽힐 수 있는데, 그게 아니라 어딜 어떻게 공략해야 대충 너무 밉상이 아닐 정도로 깎을 수 있는지 하는 경험을 터득하게 되었단 뜻이다.

내가 아는 지인은 코로나 시절 밖에 나가서 이발하긴 싫고 스스로에 대한 기대수준은 높지 않아서인지 그냥 맘편하게 가드 하나 끼우고 머리 전체를 밀어버리는 식으로 (그래서 스포츠 머리가 되는) 살고 있다만. 난 그 정도의 멘탈은 되지 못하는지라 1년 내내 여기 저기 야금 야금 잘라보면서 실험을 해본 끝에 나름의 공식을 터득하게 된 것이다.

집에 감금 상태가 된 이후로는 아무 생각없이 있다가 머리가 꽤 덥수룩해진 것을 알게 되고 이게 생활에 불편함을 가져다 주는 것을 깨닫고 (사실 귀 근처라든가 뒷목이라든가 머리가 길어지면 없었던 근질 근질한 느낌이 생긴다. 이게 엄청 성가신 느낌을 준다. 대략 마지막 이발 후 2달 여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적당한 헤어컷이 필요하단 것을 깨닫았다. 처음엔 머리 털이 난 주변부를 소위 바리깡으로 적당히 쳐내는 것만으로도 만족했었는데, 그 이후로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나만의 공식을 거의 완성하기에 이르렀단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대부분의 머리 자르기 방법을 알려주는 유튜브에 보면 잘 설명해준 내용인데, 그것을 내 것으로 체화하는 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단 것이다. 어차피 내 헤어스타일에 관심있는 사람, 그리고 그걸 트집 잡을 사람은 오직 나뿐이니까 나만 만족할 수 있는 정도로 자르면 된다.

잘해야 한 달에 한번 머리 깎는 정도인데, 돈이 들어봐야 얼마나 들겠으며 머리 자르는 곳을 찾아가는 게 귀찮아봐야 얼마나 귀찮겠냐만, 이젠 머리 깎으러 어딜 가야되나 생각해야 할 이유도 없고, 심심하면 면도하듯 이발 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저 기쁠 뿐이다. 이렇게 알게 모르게 필요없이/쓸데없이 남에게 의존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생각해 봄과 동시에 타인에게 의지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인생 또한 그다지 좋아보이지 않는 구나 하는 생각도 아울러 하게 된다. 누군가 자기 일을 해주게 되면 그것을 당연한 듯 받아들이고 사는 인생들의 불쌍함도 아울러.

무슨 말이냐면 내가 어떤 문제를 케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그 문제를 더 잘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할지 고민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고, 점차적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누군가에게 완전히 의존하고 내버려두었더라면 나는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한다. 누군가 자기 생각대로 해놓은 것에 만족하거나 아니면 (대놓고 불평할 수 없으니 속으로) 불평하면서 지낸다거나 둘 중 하나가 되겠지.

이젠 더 이상 머리 자르는 곳에 찾아가야 할 이유도 없고, 의자에 앉아서 어떻게 잘라 달라고 주문해야 할 필요도 없고, 아 이거 황당하게 잘라서 엉망되는 거 아닌가 해야 할 이유도 없고, 집에 와서 거울을 보며 황당해 해야할 이유도 없다. 어차피 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한정되어있고, 내가 아무리 잘 설명한들 내 생각을 찰떡같이 알아줄 사람도 나 말고는 없다. 가끔 심심하면 과감히 새로운 시도를 해볼 수 있는 것도 나 자신이니까.

거울 앞에 선 내 모습에 뭔가가 필요하다고 느껴질 때 아무 생각없이 면도기 집어들 듯, 가위와 바리깡 집어들고 살짝 살짝 잘라주면 1년 내내 맘에 들지 않는 내 자신을 거울로 바라봐야 할 이유가 사라진다. 지루하게 맨날 같은 헤어스타일을 고집하고 있구나 싶으면 새로운 시도를 해볼 수도 있다. 어차피 내가 의도해서 시도한 것이니까 거울을 볼 때마다 누굴 원망할 이유도 없고, 다음엔 또 다른 시도를 해봐야지 하는 나름의 희망도 생기게 된다. 머리를 어떻게 자르든 나는 나일뿐.

물론 세면대와 바닥을 자주 자주 치워줘야 한다는 번거로움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