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톨스토이가 썼다는 이 이야기는 살면서 대여섯번 정도 읽어봤던 것 같다. 책도 잘 읽지 않는 내가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것 같다. 뭐랄까 톨스토이 단편선은 읽을 때마다 이 이야기들을 처음 읽었던 초등학생 시절이 떠오를 정도로 무슨 우화 같기도 하고 뭐랄까 좀 더 심오해져야 할 것 같은데 이상하게 여우와 두루미가 나올 것 같고 하고 말이다. 물론 전쟁과 평화를 여기에 대면 확실히 이 이야기들은 나와 같이 우매한 사람들 용으로 쓰여졌구나 싶기도 하고.

여기서는 사람은 ‘사랑’으로 살아간다라는 이야기를 길게 이야기하고 있고 나도 그것에 매우 공감하는 바이지만 그것이 생각보다 잘 안되는구나 싶다. 너무 멍청하게도 ‘사랑’해야 할 사람은 사랑하게 안되고 ‘사랑’힐 필요 없는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고나 할까. 삶이 어느 정도 지나오고 난 뒤로는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하게 되어지지 않기도 하고 ‘사랑’한다는 것을 내비치기도 쉽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왜? 이상하게도 법적으로든 실질적으로든 ‘남남’ 관계인 사람에게 낯 부끄럽게도 ‘나는 널 사랑하고 있어’ 라고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아도 ‘같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 즐겁다/유익하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 만으로도 그 뜻은 충분히 전달이 되는 것 아닐까 싶다. 꼭 연인과의 관계에서만 이것이 해당하는 것이 아니지 않을까? 연인과의 관계에서는 사랑한다는 구실로 사람을 쓸데없이 구속하는 것이 되려 몹시 피곤하고 질리게 만들었던 것 같은데, 차라리 그렇게 질리게 하지 않았더라면 오래도록 좋은 사이로 남을 수 있지 않았을까?

어리석게도 이 관계는 애초부터 ‘서로 결혼하게 될 게 아니면 꺼져!’ ‘Yes or no?’에서 ‘Yes’하면 노예가 되는 그래서 대놓고 열어주고 보여주고 나눠야 하는 그런 관계였던 것 같다. 별로 내키지 않는데도 만나야 되고 만나서는 꼭 즐거운 얼굴을 하고 있어야 되고 아낌없이 주어야 되고 내가 상대방과 딱 맞는 짝이라는 것을 늘 확인시켜주느라 바빴던 것 같다. 혹시라도 지겨워서 또는 장난삼아서 잠시라도 여기서 삐딱선을 타는 순간 관계가 급반전되는 경우도 경험했고. 지금 생각하면 이게 무슨 서로 사랑하는 관계인가 싶다. 처음부터 용기(를 내어야 한다. 여자친구가 없으면 그것도 불편하니까)를 내서 비위 따위는 맞출 필요없는 관계가 되어야, 그래서 ‘이래도 yes?’해야 했는데 하는 생각도 하고.

지금 생각하면 연인이란 관계도 서로 필요에 의해서 만나고 이상하게 상대방이 좋아보이는 환각에 사로잡혀서 진짜로 상대방이 없으면 안될 것 같은 착각의 중증에 빠졌다가 깨어나는, 뭐 이게 다 호르몬의 작용 때문이다 하는 것 같은데, 그 과정에서 원치 않은 상처를 남기는 관계가 아닐까 한다. 어차피 필요(호르몬의 작용이든 뭐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에 의해 시작되어 착각과 실수로 진전된 관계이니까 서로의 득실을 따질 이유가 없는 것이지 싶지만 가장 처절하게 서로의 득실을 따지고 아무리 많은 것을 얻어냈다고 해도 자신의 인생이 타인에 의해 망가졌다고 서로들 주장하는 그런 관계인 것이다.

그냥 좋은 친구가 되어서 만나고 만날 때 마다 즐거운 관계로 지속되었다면 서로 상처받을 일 없고 또 다른 사람을 찾아 헤메느라 시간 소모 할 필요없이 좋았을텐데. 그게 꼭 누가 누구를 독차지 하는 관계가 되어야 하고 또 결혼으로 이어져야만 하는 관계가 되어야 되고 복잡하게 모든 식구들까지 연결되어야 하는 관계가 되어야 하는 게 지금도 이해가 되질 않는다.

그런 관계로 만나고 헤어질 거라면 어차피 다음에 누군가와 만나게 되든 마찬가지 결말을 보게 되는 것 아닌가? 그런 계산 때문인지 기왕에 잘해봐야 몇년 만나고 말거라면 뭐라도 이득을 좀 건져보자는 심산으로 뜯어갈 게 많은 인간이었으면 하니까 얼굴로 뜯어먹든가 돈으로 뜯어먹겠다는 심산으로 누굴 만날테니까 그런 메리트가 하나도 없는 사람이면 내내 혼자일 수 밖에.

그 계산이 너무 생각보다 단순하기 때문에 세상은 너무나도 쉽게 읽힌다. 대개 다대일 대응이 되기 마련이다. 사람이 꼬이는 사람들은 나이먹고 볼품없어질때까진 계속 사람들이 꼬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애초부터 아무도 꼬이지 않는다. 스스로 적어도 그런 소양이 있다면 또 누군가에게 정착하지 않으면 내내 그런 식으로 이런 저런 사람과 지내면서 살아가고 아니면 본의든 아니든 고고(苦苦?, 孤孤?)한 삶을 살아가는 것 아닐까?

도무지 이런 조건에서 사람은 ‘사랑’으로 살아간다는 말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한치앞도 모르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어떤 상황에서든 손해(?)보지 않고 어떻게든 이기는 게임만 하고 싶은 사람들만 득시글 거리는 세상에서. 어차피 그런 게임을 못할 바에야 아예 게임에서 벗어나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세상에서. 누군가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데에 확실한 이유와 명분이 필요한 세상에서.

그렇게 살다보니 아침에 일어나서 어제보다 하루 더 늙은 스스로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의 배우자와 파트너가 이렇게 늙고 추해져가는 모습의 날 계속 사랑해줄까 하는 생각을 하며 불쌍한 삶을 살아가는 게 아닐까? 물론 그 반대의 경우로, 매일 아침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스스로가 자신의 파트너에게는 차고 넘치는 상대라고 생각하면서 그에 걸맞는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불만으로 시작하는 사람도 있겠지. 그런 마음으로 온 종일 자신의 파트너에게 정신적인 학대를 가하면서 사는 게 일상화된 사람도. 그러니까 애초에 흥정/계약을 잘못했구나 하는 생각 속에 살아가는 거다.

그렇다. 사랑은 흥정이고 사랑은 거래이고 계약이다. 이게 사람이 그것으로 살 수 있는 ‘사랑’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사랑’인 거다. 애초에 계약을 잘 못 하면 그걸 가지고 내내 후회하며 사는 거다. 마치 속아서 잘 못 구입한 집 때문에 내내 골치를 썩고 팔지도 못하고 울며겨자 먹기로 계속 들어가서 살아야 하듯. 그렇지만 그 집을 고쳐서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고 그래서 다시 되팔 수 있다. 아니 그냥 지금 손절할 수는 선택권도 내게 주어져있다.

어차피 이렇게 골치 아플 바에야 반품이 허락되어있는 기간동안 trial만 하고 평생을 아이쇼핑만 하면서 살 수도 있겠지. 어떻게 살든 자유인 것인데. 물론 진열장 구석에 쳐박혀서 혹은 아예 진열장까지도 못가고 ‘언젠간 나도…‘하는 착각 속에 창고안에서 내내 썩어갈 수도 있다.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