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SB 포트 수리하려다 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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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용하는 기기 중에 Fractal Audio AX8라는 게 있다. 여기에 USB B 포트가 달려있는데, 이것의 용도는 컴퓨터와 연결해서 내부 패치 편집을 할 수 있게끔 하는 것이었는데, USB B 포트의 특성상 중심부에 단단한 플라스틱 기둥이 있고 그 기둥을 둘러 4곳에 전극이 있게 되어있다. 이게 일반적인 USB A 4 pin(data+/-, Vcc/GND)과 같은데 왜 이렇게 만들어놨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러하다.

문제는 AX8에 연결해서 쓰던 USB 케이블이 너무 짧아서 기기가 어쩌다 멀리 위치하게 될 때 문제의 그 플라스틱 기둥이 부러져 버렸다는 것이다. 그게 플러그에 끼워진 채로 나왔다가 새로운 케이블을 연결하게 될 때 4개의 전극들이 모두 뭉개져 나가 버린 것을 모르고 있다가 패치 편집이 안되는 것을 보고 나서야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같이 물려쓰던 Macbook pro에서는 USB device가 전류를 과하게 쓰고 있다고 강제로 꺼버리겠다는 알람도 계속 떴는데, 이 기기 때문인지는 몰랐었다. 다시 말해서 새로운 케이블을 연결할 때 컨넥터 핀이 모두 뭉개지면서 VCC/GND가 short가 난 것이다.

사실 수리 과정은 매우 간단해 보였다. 커버를 열고 USB 포트를 들어낸 다음 새것으로 교체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USB 포트를 들어낼 때 생겼다. 내가 가진 납땜 인두가 30W 짜리라 포트를 고정하던 납을 제대로 녹이지 못했는데, 그것을 강제로 뽑아내다가 data pin에 연결된 low pass filter (SMT 부품으로 된 coil, L)를 건드려서 기판에서 떨어지게 만들었고 또 부품도 손상되어버렸고 거기에 포트도 제대로 제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새로운 인두를 주문하느라 2-3일을 더 소모하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작업을 할 수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도 연겨풔 실수를 하는 통에 돈과 노력을 전부 들였지만 수리는 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 망가뜨려 놓은 결과를 얻게 되었다.

그러니까 애초에 충분히 열을 올릴 수 있는 인두를 사용했더라면 모든 과정이 쉽게 흘러갔을텐데, 괜히 어줍잖은 물건을 가지고 씨름을 하느라 힘은 힘대로 들고 오히려 아무것도 안 한 것만도 못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나이가 들어도 예전 버릇은 쉽게 안 고쳐진다더니, 물건을 한 번 뜯으면 어떻게든 다 고쳐놓고 닫아놔야 한다는 쓸데없는 고집이 이 사태를 불렀다. 전략적 후퇴라는 말도 있지 않는가? 시작했지만 중간에 뭔가 준비가 덜 되어 승산이 없을 것 같다고 판단되면 곧바로 철수하는 것도 나름의 전략이다. 일단 진격했으니 끝을 봐야겠다고 내가 가진 전력이 모조리 소모될 때까지 끝을 보는 것은 그냥 어리석은 거다. 애초의 목적이 말끔하게 수리된 USB포트를 얻겠다는 것이었는데 그것만 잘 유념했어도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어리석게도 내가 하는 일의 목적을 잠시 잊고 준비 안된 조건에서 쓸데없이 용을 쓰다가 안되니까 되려 홧김에 멀쩡한 것들을 모조리 망가뜨려놓는 결과를 낳았으니까.

인생살이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가 나의 인생 목적을 ‘오래도록 안정되고 행복한 삶을 살자’라고 해두었다면 그동안의 투자된 노력과 시간이 많다 하더라도 승산이 보이지 않으면 철수하는 게 괴로움 속에 귀한 내 인생을 몽땅 날려먹는 것 보다 나은 결정인 거다.

누군가와의 관계가 그동안 처음엔 너무 너무 잘 될 것 같아서 열심이다가 뭔가 신뢰를 훼손하는 일들이 하나 둘 씩 생겨나면 그동안 들인 시간과 노력에 대한 보람은 커녕 앞도 보이지 않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게 확실히 그렇다고 판단이 되면 거기서 그 사람을 보내주어야 맞다. 나와 그 사람 모두 준비가 안되어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니까. 이 관계를 어떻게든 바로잡아보자고 준비가 안된 채로 억지로 노력을 해봐야 남은 신뢰마저 망가질 확률이 높다. 그렇게 내게 남은 인생을 걸 필요는 없는 거다. 누군가와 천년 만년 꾸역 꾸역 살아가는 것을 일생일대의 최대 과제로 부여받은 사람처럼 고분분투하며 살아갈 필요가 없는 거다.

신기하게도 맞지 않는 옷은 어떻게든 입어보지만 맞지 않는, 또 이런 저런 일로 잘 맞지 않게 된 사람과 어떻게든 잘 지내보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내가 그 사람에 대해서 기대하는 바가 전혀 없게끔 하면 좀 나아지려나 싶지만, 인간관계라는 게 상대방에게 아무런 기대가 없이 유지할 수 있는 게 또 아니다. 상대방에게 최소한으로 바라는 것도 없다면 왜 내 귀한 에너지를 소모해가며 그 관계를 유지해야 하나? 그래서 다들 요샌 혼자인 사람들이 많은 거라 이해한다. 애초에 누군가에게 어떤 기대가 생긴다는 자체가 결국은 나 자신을 소모하는 일이니까.

위에 정리해놓은 것을 다시 적어보면,

너무 뻔한 얘기지만, 이걸 제대로 못해서 아까운 사람 하날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