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2 정말 좋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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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어디 게시판에서 누군가 신디는 ES2 하나면 된다는 얘길 듣고 ‘뭔 소리야..’했던 것 같은데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이번에 이렇게 80년대 음악과 ES2를 가지고 놀면서 절실히 깨닫은 것이 ‘신디사이저 정말 별 거 아니네?’랄까. 정말 별 것 아니란 말이라기 보단 그동안 내가 무리스럽다고 생각한 것 만큼 괴롭게 어려운 건 아니란 뜻이다. 뭐든 좀 익숙해지고 알게 되려면 어느 정도 노력과 시간이 필요한 데 그게 무한히 많이 들어가도 끝내 이해할 수 없는 그런 괴물스러운 존재는 아니다라는 얘기지.
예전엔 뭐 좀 가지고 놀아볼까 하면 잘 알려진 악기 플러그인이라든가 잘 알려진 샘플 라이브러리에서 프리셋 찾다가 결국 관두는 게 99%였다. 사실 그래서 더 어렵게만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당장 뭘 좀 해야겠다 싶어서 급한데 나오는 건 없고 하니 제대로 만져볼 생각도 안하고 신디사이저의 그 덩치를 보고 있자니 마냥 어려울 것만 같고. 쉽게 말해서 그 옛날 신디사이저라고 해도 소리의 백과사전(?)쯤은 능히 들어갈만한 공간 아닌가? 그런데 그렇진 못했다만.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UI와 고작 sine 을 비롯한 wave table 돌리는 장치가 왜 이렇게 커야만 했나 하는 생각이 들지만. 대부분 필요한 연산이라는 게 wave table을 불러대는 것 말고 전부 곱셈이다보니까, 또 LFO와 filter 등등을 많이 넣으려고 보면 예전 DSP로도 일이 몹시 벅찼을테니까 그럴 수도 있다고 본다만.
어쨌든 난 이번에 끈질기게 ES2 하나만 믿고 해보니 로직에 들어있는 여타의 다른 신디들과는 차원이 다르구나 했다. 물론 Sculpture라든가 Alchemy처럼 덩치가 크고 ‘새로운 맛’(?)의 신디가 있긴 하지만 이것들은 뭐랄까 좀 창의적인 소리가 필요한 경우(?)에나 쓰임새가 있고, 아무 때나 막 쓰기 좋고 쉽게 소릴 만들 수 있는 것은 단연코 ES2 이구나 싶다.
처음 접하면 인터페이스가 다소 복잡해서 거부감이 생길 수 있는데 이걸로 재미있는 소리 몇 개를 만들고 나면 정말 푹 빠지게 된다. synthesizer라는 말의 뜻이 그러하듯 내가 원하는 소리를 합성할 수 있어야 신디라고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대부분의 신디는 그 안에 들어있는 프리셋 믿고 찾아가게 되는데, 이게 한계가 너무 뚜렷하다. 찾다 찾다 안되면 비슷한 걸로 그냥 뭉개거나 하면 재미가 없다. 적어도 소리가 어느 정도는 비슷해야 재미가 있고 계속 붙어서 할 수 있지.
오늘 대낮부터 재미삼아 가지고 놀고 있는 게 Yazoo의 Don’t go라는 80년대 노래인데, 검색엔진에 물어보면 80년대 대표적 신디팝이라고 뜨는 곡이다. 잘 안들리는 소리가 많아서 대충 들리는 것들만 찾아서 넣어봤다.
딱 듣자마자 대부분의 음색이 그렇듯 saw wave를 기본 베이스로 하고 있구나 싶은데, 막상 음색을 만들어내려고 보면 여러 가지 특이한 걸 발견하게 된다.
- 튠이 안 맞는 경우가 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원 곡은 tune이 제대로 안 맞아있다. 전부 다 고르게 튠이 틀어져있으면 모르겠는데 어떤 건 살짝 위로 튠이 되어있고 어떤 건 살짝 아래다. 내가 귀가 안좋아서 그런가 여러 번 확인해봤는데, 분명히 튠이 아래 위로 틀어져있는데 이게 또 정상적인 튠으로 하면 원곡의 맛이 다 날아가는 신기한 경험도 하게 된다. 절대음감도 아니고 뭣도 아닌 내 귀에도 그 차이가 구분이 되는 걸 보면 신기한 노릇이지.
- 대개 어떤 음색의 주 음이 되는 높이의 음만 찾아서 만들게 되는데 대부분의 음색은 한 두 옥타브 높은 혹은 낮은 음들과 같이 배합되어있다. 원래 음이란 게 순수한 sine wave가 아니면 근음 주파수의 정수배 harmonics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그것은 내가 만들지 않은 음색이니 그렇구나 하는 것이지, 막상 내가 만들려고 하면 이런 것도 고려해야 한다. 그래서 신디사이저가 2개 혹은 3개의 OSC (혹은 wave generator)를 기본으로 가지고 있고 그것들을 mix할 수 있게 되어있는 거다. 처음엔 복잡해서 싫었는데, 어차피 귀찮으면 3개 중에 2개는 다 꺼버려고 누가 뭐랄 사람없다.
- ADSR 이게 참 중요하다. ADSR의 기본 개념은 아주 어렸을 시절 사운드 카드에 들어있는 설명서를 보고 쉽게 이해했지만 어떤 음색을 딱 듣고 그 음색의 ADSR이 어느 정도겠구나 하는 이해는 전무했다는 걸 알았다. 이것만 잘해도 음색을 합성하는 것은 못 해도 1/3 이상은 하는 것 아닐까 싶은데.
- 아르페지에이터를 쓰는 경우가 제법 많아서 딱 듣고 그걸 구분하는 게 여러 가지로 편리하다 싶다. 아르페지에이터에 딜레이를 잘 섞어쓰면 2023년인 지금에도 여전히 미래(?)스러운 소릴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신디사이저 S/W에 아르페지에이터를 품고 있는 경우도 많고 DAW에서 지원하는 경우도 있고 워낙 다양한데 역시 좋은 신디에 포함된 아르페지에이터가 그 개념이나 자유도가 매우 높다.
- ADSR을 Envelope라고 하는데 신디사이저라면 최소한 1개의 Envelope generator는 가지고 있고 두 개 이상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대개 filter에 관련된 것 하나, amplification에 관련된 것 하나를 쓸 수 있다. 두 개를 같이 공유하는 경우도 있고. 이 두 가지를 조합했을 때 의 특징을 귀로 잘 익히면 정말 좋을 듯 하다.
- 대개의 소리는 생소리와 거리가 멀고 Env가 제법 만져져 있기도 하고 Chorus나 Flanger, 또는 phaser 그리고 delay 잔뜩 걸려있는 소리도 있다. 그래서 어떤 소리를 들었을 때 이걸 적당히 분리해낼 수 있는 능력도 필요하다. 그러니까 원래 음색이 그러한 것인지 아니면 effector가 잔뜩 걸린 것이지 구분이 필요하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펙터의 종류는 고작해야 이 4개가 진하게 걸려있다는 거다.
- 신디가 주된 음악을 듣고 느낀 건 대부분 그 음색의 베이스는 Saw wave라는 것이고 또 Saw가 주축이 되어야 신디 다운 소리가 난다는 것도 참 재미있는 일이다.
사실 오래된 신디사이저인 DX7을 가지고 놀면서 이것 저것 귀로 느끼며 배워보자는 것이 목표였는데, 뭐랄까 시그널 체인의 구성도 복잡하게 패치마다 다르고 Dexed라는 신디의 UI도 만족스럽지가 못해서 다른 신디사이저에 의존하다가 결국 ES2에 안착하게 되어 잘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 까면 깔 수록 기능으로 가득한 신디로구나 싶다. 비록 로직에 내장되어있고 UI도 사실 실물의 신디에 비하면 조잡해보이지만, 정말 이것 한 개로 뭐든지 할 수 있는 그런 막강한 신디사이저다.
아래는 ES2로 대충 두시간 만에 대부분을 후딱 끝냈(기 때문에 품질이 형편없는)다. ES2와 드럼머신 플러그인 하나로 다 끝난다. 재미난 기타곡 하날 잡으면 못해도 이틀은 그냥 날아가는데, 80년대 음악들은 재미있고 나처럼 이쪽에 아는 바가 전혀없는 사람이 진입하기에 정말 착하기 그지없는 보물창고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