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살아본 건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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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란 것을 다닐 때 학년이 올라가면 나도 나보다 나중에 들어온 이들에게 ‘선배’ 소리 들을 자격이 되려면 적어도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말 몇 마디는 해줄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들과 내가 아무런 차이가 없다면 나는 그저 그들과 동년배일 따름이지 선배로 불릴 이유가 없구나 하고 말이다.
하다 못해 텃밭에서 기르는 작물도 어떤 것은 더디게 자라기도 하고 어떤 것은 생육이 굉장히 빠른 것들이 있게 마련 아닌가? 내가 그들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면 그냥 내가 먼저 심어졌다는 이유로 나중에 심어진 것들에게 ‘선배 노릇’을 할 수는 없는 거다. 늦게 심어졌든 빨리 심어졌든 더디게 자라든 빨리 자라든 다 같은 작물이고 빨리 자란 만큼 아니면 더디게 자란만큼 그만의 장단점이 있을테니까.
그런 생각 때문인지 ‘형’이라고 불리운다든가 ‘선배’라고 불리우는 게 별로 달갑진 않았다. 그렇게 불리우면 뭔가 더 잘해내야 할 것 같고 도움을 주어야 할 것 같으니까. 불행히도 난 그럴 준비가 안되어있다는 생각만 들었으니까.
‘동생’이 생기면 좋겠다 하고 다니던 아이들과 다르게 난 어쩌다 정신 차려보니 ‘동생’이 있었고 ‘동생’이란 존재는 잠시 어렸을 때 같이 놀아주어야 할 존재, 어리고 귀엽다는 이유로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 하는 존재였지, 그 이후로는 같은 부모 아래 태어난 나와 동등한 우리 가족의 구성원이었으니까 특별히 ‘형 노릇’, ‘동생 노릇’을 해야한다는 생각은 해본적이 없다.
그래도 나이차가 얼마 안나는 동생이나 선후배의 관계와는 달리 뭐랄까 나보다 나이가 한참 어린 사람과 이야기 하려고 보면 괜히 인생을 먼저 살았답시고 도움을 주고 싶은 생각이 있다.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해서 나이 차가 많이 나다보면 내가 어린 시절에 가졌던 생각은 지금 세상에 전혀 통하지 않는 것이라 ‘어차피 도움 안될 건데’ 하고 아무말도 안하고 있으면 뭐랄까 인정머리 없는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다. 또 그렇다고 ‘나는 이랬으니까 너는 이래라..’하는 것도 웃기는 것이다. 그래서 고작 할 수 있는 건 ‘난 그때 이랬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이랬었으면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하는 정도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삶이 나에게 기회를 또 준다면 그들이 살고 있는 삶을 다시 어려진 나의 모습으로 돌아가 다시 살아보고 싶단 생각이 든다.
학교에 다니고 있을 시절엔 난 그냥 내가 ‘노력한 만큼 받는다’ 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그동안 노력했으니까 지금의 내가 있고 지금의 내가 더 노력하면 뭔가 더 나은 내가 되어있겠지 하는 생각도 하면서. 또 나보다 잘나 보이는 사람들에겐 ‘그만큼 더 노력했겠지’ 혹은 ‘좋은 머리를 물려받았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내가 그만큼 하지 못할 때는 스스로 게으른 자신을 탓하거나 부족하게 태어난 만큼 더 노력하지 않는 자신을 탓했다. 때로는 무엇이든지 나보다 월등히 많이 알고 잘하는 존재를 만날 때도 있었는 그럴 땐 스스로를 탓하는 단계를 넘어서서 그렇게 모든 면에서 완벽해보이는 그 사람이 미워지는 마음이 생기기도 하고 그래서 스트레스를 덜 받기 위해 멀어지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잘 생각해보면 나란 사람도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들면 내 자신의 모자른 점보단 어떻게든 겸허해보이면서도 나 자신의 장점을 드러내보이려 하기 마련이지 싶다. 그러면 그럴 수록 그 사람에게 가까이 가려 하는 게 맞지 멀어지려는 마음을 갖는 것은 역시나 좋은 태도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흔히 사람이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다거나 좋은 느낌을 주려면 무조건 잘나고 완벽해보이기 보단 어설픈 구석이 있어야 된다 하는데, 정말로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은데 짐짓 어리석은 체 하는 게 가능할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또 그 사람의 평소의 모습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기에 억지로 잘나 보이려고 혹은 어설퍼 보이려 한다고 해서 그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살면서 더러는 왜 나는 내가 얻어 배울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있을까? 혹은 왜 나는 내 주변사람들보다 한참 모자른 사람처럼 느껴질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나고 보면 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나에게 해를 끼쳤든 도움을 주었든 다 소중했던 인연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때의 그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나도 있었고 내가 그것은 원하지 않든 원했든 난 그들과 함께 했어야만 했던 것이니까 그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했었어야 한다고. 단지 나의 기대에 부합하지 못한다는 어리석음으로 그들과의 관계에서 얻을 수 있었던 좋은 기억들을 만들지 못했구나 하고 말이다.
지금도 나는 수많은 좋은 기회 - 시간이라는 한정된 자원이 주고 있는 - 들을 이렇게든 저렇게든 흘려보내고 있다. 운이 좋으면 기대하지 않았던 기쁨을 주기도 하고 더러는 실망스러운 결과를 가져다 주긴 하지만 어떻게든 나와 다른 존재들과 접하고 알아가는 것은 살아가는 데 많은 도움과 새로운 전개를 가져다준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 모든 것이 ‘운’을 결정한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인생에서 만나는 모든 것이 ‘인연’이고 ‘운’인 것이다. 내가 의도한 것이 아니고 나의 의지대로만 된 것이 아니기에. 나의 ‘노력’이란 것은 어떤 조건이 주어지지 않으면 아무리 애를 써도 지극히 미미한 영향만 가져다 줄 뿐이다. 그것이 무엇이 되든간에 나란 존재로 하여금 ‘의지’와 ‘노력’을 하게 만든 기회와 계기 모두 다 ‘운’과 ‘인연’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니까. 지금의 나도 수많은 운과 인연이 나와 결합하여 나타난 결과일 뿐인 거다.
내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수 많은 운과 인연의 조합으로 나타날 그들만의 인생 행로가 한참 남아있는 이들에게 고작 나의 짦은 삶에 대한 나의 기억과 해석을 근거로 삶이 이렇더라 저렇더라 이야기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있을까 싶다. 되려 나는 나와 다른 그들이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과 생각에 대해서 듣는 것이 좋다. 그들이 가진 나와 다른 시각과 생각을 듣는 것이 너무 재미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되기 까지 그들의 삶이 흘러온 이야기라든가 그들이 자라난 환경들에 대해서 듣는 것도 참 재미있다. 무의미하고 어리석은 생각이지만 가끔씩 ‘내가 저런 생각으로 살았다면 훨씬 더 재밌게 살았을텐데’ 하는 생각도 한다.
솔직히 말하면 앞으로 재미있는 혹은 힘들고 괴롭더라도 살아갈 날이 나보다 훨씬 많은 그들이 부럽다. 이미 생의 많은 시간을 난 이렇게든 저렇게든 무의미하게 탕진해버린 느낌이 들때도 있다. 생의 한 순간이라도 그렇게 무의미하게 쓰여지길 원하지 않았더라도 삶이란 게 그런 것 아닌가?
생에 몇 번 없을 여행을 가서 멍하니 그 아름다운 바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순간에도 난 ‘과연 이게 내 생에서 의미가 있는 일일까?’하는 헛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의미가 있고 없고 값어치가 있고 없고는 내가 판단할 일이다. 어차피 지나간 인생이면 달았든 썼든 지나간 것일 뿐. 예전의 것이 지금의 것이 될 수 없고 그것이 아무리 좋았더라도 그냥 지나간 것일 뿐이다. 지금의 것을 좋고 행복한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다행이고 그렇지 못하더라도 이 순간을 살아갈 수 있다면 감사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