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관두고 싶을 때...

일을 관두고 싶은 생각은 주기적으로 찾아온다. 대개 2-3년 간격이었던 것 같다. 주로 하고 있는 일이 재미없거나 다른 이들이 세상 흐름에 맞춰 가지 못해서 그래서 끙끙대는 잡일(?)들이나 해결하고 살고 있다고 생각할 때 그렇다.

생각해보면 거의 그랬다. 나는 적어도 이 업계에서 평균적인 능력이나 pace로 살고 있고 소위 1위 업체에서 일을 하고 있는 입장이 아니었기에 후발주자로서 겪는 심적부담을 가지고 있었을 때도 있고 약간의 패배감 같은 것도 있었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능력이 없거나 너무 소수의 인원으로 일하니까 참신하거나 창의력이 떨어지는 방식으로 그러니까 결과를 빨리 내기 위한 방식으로 살아왔다고 또 그렇게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주로 선두 회사의 사람들이 외부에 나와서 발표를 한다거나 할 때 발표자료의 fancy함이라든가 발표하는 능력, 언어/용어의 친숙함 등등을 봤을 때 굉장히 세련되었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선두 회사에서 일하다가 온 사람들을 같은 팀에서 만나게 될 때도 마찬가지의 느낌을 받는다. 굉장히 반응이 빠르고 용어의 선택 능력도 탁월하고 발표능력도 뛰어날 뿐더러 등등.

사실 이것은 영어 구사 능력에 한하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영어가 아닌 한국어를 구사하는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언어 구사력이 뛰어나면 한층 본인의 능력을 잘 발산할 수 있다. 같은 문제도 원리적으로 접근해서 그것을 마치 스님이나 신부님이 나와서 평이한 언어로 삶의 문제에 대해서 대중에게 이야기하는 식으로 하면 격이 없어보인다. 적어도 업계 사람들한텐 그렇다. 같은 문제도 뭔가 수준 높아 보이고 어렵게 이야기하지만 그래도 정곡을 잘 꿰뚫고 있다면 확실히 ‘있어 보인다’, ‘신뢰가 간다’ 할 수 있다.

그런데 나의 접근방식이란 무얼까, 늘 ‘귀찮은 문제’가 새로 하나 나왔구나, 그러니까 지적인 측면에서 호기심이나 동기부여가 되는 문제라고 생각하기 보단 ‘노가다’가 필요한 문제로 인식하며 시작하기 때문에 어떤 문제를 풀기 위해 착수하고 해결방법을 찾아내고 결말을 맺을 때까지의 과정이 쉽게 비유하면, 하기 싫은 집안 일 (하수도가 막혔거나 하는 등의 집수리) 을 해내기 위해 일어나기 싫은 새벽 시간에 겨우 겨우 일어나서 늘상 하는 방법으로 겨우 겨우 떼우고 나서는 잘 되는지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테스트해보고는 그제서야 ‘밥벌이를 위해 할 만큼 했다’하고 끝내는 식의 모양새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 귀찮은 집안일을 해야 되는데 그게 내 일이니까 나 혼자 다 해내야 하는데, 혼자하긴 능력의 한계가 있거나 너무 바쁠테니, 누군가를 하나 더 불러서 협업을 하라고 한다치면 그 동업자를 inspiring하게 하는 사람이기 보단 ‘아 귀찮은 일인데 나 혼자 못할 것 같아서 도움이 필요하게 되었네. 도와달라고 해서 미안해. 그래도 어떻게든 해봐야겠으니까 일단 좀 해보자.’ 인 사람인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둘이 이 도전적인 문제를 같이 풀어볼까? 이 문제를 같이 해결하다보면 재미있는 일이 많이 생길 것 같아 벌써부터 흥분이 된다. 네 활약도 몹시 기대가 되고 말이지. 우리 같이 즐겁게 이 문제를 풀어나가 보자’ 라기 보단 뭐랄까 그냥 힘빠지고 재미없고 귀찮은 일을 어쩔 수 없이 해야되는 구나 하는 마음을 갖게 한단 말이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원인을 찾아보면,

  1. 내가 후발주자다. 업계 tier로 보면 거의 3rd tier쯤 된다 (실제로 그런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나도.).
  2. 당연히 후발주자니까 나의 능력이나 경력도 3rd tier밖에 될 수 없다.
  3. 당연히 내가 뭘 해내든 그것은 3rd tier가 해낸 것이니 결과물도 1st/2nd tier가 될 리가 없다. 그러니까 모자를 수 밖에 없는 거다.
  4. 적어도 2nd tier도 못 될 거 이런 일을 내가 뭐하러 하고 있나? 차라리 어디가든 1등 할 수 있는 걸 해야 되는 거 아닌가?
  5. 이 정도의 일이면 적어도 내가 1st tier에 드는 엔지니어라면 이것의 10배쯤 되는 일도 혼자 거뜬히 할 수 있어야 되는데, 그렇지 못해서 나보다도 능력 떨어지는 누군가를 데리고 같이 해내야만 하는 구나.

이 모든 생각들은 사실에 기반하지 않은 왜곡된 생각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러니까 엄밀하게 내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 업체들의 능력이나 기본 소양을 가지고 모두 통계내어 보고 그 안에서 내가 어느 정도 되는 구나 정확히 계량해보고 한 생각이 아니라는 거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런 거 따져봐야 다 무의미하단 거다. 따져보고 싶어도 알 수 없는 거고 일단 일을 시작했다고 하면 그냥 최선을 다하는 거다. 그냥 내게 편한 창의적인 방법으로 해내면 되는 거다. 내가 1st tier가 되겠다는 목표로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주어진 일을 내 방식대로 재밌게 해 나가면 되는거다. 그냥 입 자체에만 몰입하면 된다. 그래서 1st tier가 되면 덤으로 주어지는 선물 같은 거고 그렇지 않아도 그러할 뿐인 거다. 내가 남들보다 못해서, 내게 주어진 조건들이 다른 경쟁자들보다 안좋아서 그랬다면 그런 것일 뿐. 그냥 내게 주어진 조건에서 내게 주어진 능력으로 할 수 있을 만큼 하면 되는 거다. 그렇게 내가 스스로 생각해보아도 재미있게 잘 했다면 그냥 그것으로 만족을 삼으면 된다.

누군가와 혹은 여러 명의 사람들과 힘을 합쳐야 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내가 일을 긍적적으로 대하는 태도를 보여주면 그뿐이다. 그 사람이 나에게 창의적이고 의미있는 결과를 가져다주든 혹은 그렇지 못하든. 나는 내 갈길을 가면 그뿐이다. 나만 못한다거나 아니면 아예 아무것도 못해내든가 혹은 나보다 월등히 잘 해낸다거나 하는 것은 그 사람의 능력과 그 나름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지 내가 영향받은 것을 아니다. 물론 박수를 쳐주어야 할 일은 맞다만.

내가 이렇게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흥미나 애착이 전부 다 떨어지게 된 이유는 다 같은 것에서 출발한다. 맨날 똑같은 일을 하고 있고 재미도 없고 같이 하고 있는 이들이 자기 일을 잘 알아서 하는 것 같지도 않고 의미없는 잡일들이나 겨우겨우 하고 있고. 계속해서 같은 종류의 잡일이나 해달라는 요청이나 맨날 받고 있으니까 그러하단 거다.

뭔가 시절 인연이 주어지면 다른 일을 하게 될 수도 있고, 또 예전의 내가 다른 일을 해보고 싶었다가 주저앉게 되었듯이 또 나를 붙들 어떤 사건이 일어나든지 하겠지. 그냥 오늘의 일에 충실하고 이런 삶의 여정을 감정의 동요없이 즐겁게 보낼 수 있다면 감사한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살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