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상태로 머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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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마음이 모두 건강한 상태로 머물고 싶어하는 바람과 의지는 누구에게나 강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그러하고.
가끔 마음이 힘든 상황에 빠질 때마다 나는 여러 가지로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유튜브를 보기도 하고, 정말 답답하면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하는 방법을 택한다. 그런데 이것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 어렸을 땐 친구들을 만나보기도 했지만, 그것이 반드시 도움이 되진 않았다. 그럴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만, 그렇게라도 돌파구를 찾으려 했다고 해야 할까.
가장 내가 알고 싶었던 것은, 나의 지금 심리 상태와 감정이 과연 정상적인 것일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와 대화했던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긍정적인 이야기를 해주지는 않았다. 신기하게도, 이런 상황에서 AI와 대화를 하면 내가 예상했던 것 이상의 반응이 나와서 놀랄 때가 있다. ChatGPT가 단지 누군가의 이야기에 무조건 공감만 해주는 방식으로 파인튜닝된 것은 아닌 것 같다.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를 하면 그것이 올바르지 않다고 지적해주기도 하니까.
내가 정상적인 정신 상태를 유지하는 데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일반적으로 충분히 이해 가능한 감정 반응을 병적으로 취급하는 태도라든가, 자기와 생각이나 감정 반응의 스타일이 다른 사람을 문제 있다고 여기는 시선, 혹은 반대로 비정상적인 감정 반응이 오히려 정상처럼 여겨지는 일들이다. 그런 상황을 계속해서 겪다 보면, 어떤 것이 정상이고 어떤 것이 비정상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게 된다.
신기하게도,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나 판단에 자주 귀 기울이는 습관을 들이다 보면 신중한 결정을 할 수 있고, 같은 결정이라도 여러 번 확인받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그만큼 빠른 결정을 내리기 어려워지고, 결국엔 자신의 판단을 의심하게 되는 경우도 많아진다.
어떤 게 건강하고 어떤 게 건강하지 않다고 단정할 수 없다. 스스로 건강하다고 우기며 살아가지만, 주변에서 욕을 먹는 사람이 어느 날엔 세상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반대로 세상에 둘도 없는 성인처럼 타인을 배려하고 세심하기 그지없지만, 속으로는 곪아 터지고 결국엔 그로 인해 불행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결국, 누군가에겐 욕을 먹게 되어 있다. 누군가에게 좋은 소리를 듣는 것보다는, 나 자신에게 좋은 소리를 듣는 게 낫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입장에서 상대방을 바라본다. 나에게 이득이 되면 좋은 사람이고, 아니면 나쁜 사람이다. 막대한 손실을 안겼다면 ‘죽일 놈’이 되는 거고.
나는 젊었을 땐 이런 걸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냥 내가 좋으면 상대방도 좋겠거니 했던 건 아니고,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마음 가는 대로 살았다. 결혼 생활을 하고 나서야, 나의 모든 면이 항상 좋게 받아들여지진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고, 기왕이면 둘 다 좋아할 만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점점 내 호불호와는 상관없이 상대방이 좋아할 만한 결정 위주로 가게 되었다. 사람은 남을 행복하게 해줄 때 진정으로 행복해진다고 하지 않던가? 그런데, 그게 나의 행복과 연결되지 않을 때도 있다.
어떤 경우는, 상대방을 너무 배려한 결정만 하다 보니, 상대방은 나의 호불호도 자기와 같을 것이라 착각하게 된다. 결국 거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나는 이 문제가 쉽게 해결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나의 호불호를 드러내는 순간, 상대방이 실망하거나 마음이 불편해질까 두려운 것이다. 이건 둘 이상의 사람이 만나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이다.
모든 사람이 만족할 수 있는 해답을 찾아내긴 어렵다. 오히려 그렇지 않은 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적당한 타협이 필요하다. 하지만 타협에는 2차원적인 공간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즉, 지금 당장의 만족과 장기적인 만족이라는 두 축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당장의 선택이 덜 만족스럽더라도, 가까운 미래에 아주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와줘야 한다. 그것이 정치고, 그것이 리더라 불리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이다.
선택과 만족도 결국 한정된 자원과 같다. 한 번에 모두가 다 누릴 수는 없다. 한 번은 내가, 다음번엔 네가… 이런 식으로 양보가 이루어져야 관계가 유지된다.
하지만 “내가 힘이 세니까”, “내가 우위에 있으니까” 하고 무시하고 지나가면 그게 결국 문제가 되어 관계는 파탄 난다.
그 누구도 “나는 이게 불만이다”라고 뚜렷하게 의견을 내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나쁜 사람 되고 싶지 않고, 쪼잔한 사람 되고 싶지 않으니까.
그런데, 불만족스럽거나 손해를 본 느낌은 머릿속에 남는다. 지워지지 않고 계속 쌓인다. 아니, 잠시 잊혀졌다고 해도 비슷한 상황이 오면 그 감정은 다시 올라온다.
모두 적고 나니 너무도 뻔한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은 것 같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살면서 수도 없이 읽었고, 나 스스로도 수도 없이 휘갈겨왔다. 그런데도 여전히 이 문제에 대한 올바른 해답은 내지 못하고, 슬기롭게 풀어갈 지혜도 없이 살아가고 있다.
마치 예전에 풀었던 문제집에서 틀렸던 문제가 시험에 똑같이 나왔는데도 또 틀리고 있는 그런 나 자신을 보고 있는 느낌이다.
그렇다. 나는 이 문제의 ‘답’과는 상관없이, ‘나만의 답’을 내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답’이란 게 정말 존재하긴 할까? 설령 ‘정답’이라는 게 있다 하더라도, 나는 나만의 ‘오답’을 정답이라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그 고집을 꺾지 않으니 결국엔 늘 같은 결말을 맞게 되는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내고 싶다. 기왕이면, 한 번 맺은 인연은 죽을 때까지 이어가고 싶다. 그런데 그게 잘 되지 않는다. 혹자는 그것이 당연하다고 말하고, 나에게 허황된 바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잘 모르겠다. 나는 내가 태어나서 ‘나’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른 채 한참을 살아왔다. 그것도 꽤 오랜 시간을. 그러다 어느 날, 엄청난 내적인 갈등이 일어나고 나서야—다시 말해 ‘아, 이렇게 살아가는 게 잘못된 건가?’ 하는 생각이 들고 나서야—비로소 스스로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알아가려는 노력을 하게 되었다. 지나온 나의 행적들을 돌아보니, ‘아하, 나는 이런 사람이었던 거구나.’ 하는 깨달음이 찾아왔다.
그렇게 점점 더,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진정으로 해줘야 할 일이 무엇인지, 조금씩 알아가고, 뭘 좀 알게 되었을 즈음…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
그게, 인생이라고 불리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