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종교모임...

‘종교’라는 것의 정의를 내가 잘 몰랐던 것일까. 종교라는 형태를 갖추려면, 나의 문제를 해결해 줄 절대자가 있고, 그 절대자에게 간절한 바람을 담아 기도하는 것이 가장 기초적인 구조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종교의 경전이나 역사적인 맥락을 살펴보면, 그 안에서 ‘절대자’로 여겨지는 존재들은 그런 기도를 들어주고 문제를 해결해주는 존재라기보다는, 삶과 죽음, 존재의 근원에 대한 가르침을 주는 존재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예전부터 흔히 들어온 말처럼, 외래에서 유입된 불교나 기독교가 토착신앙과 섞이면서 기복 중심으로 바뀌었다는 해석도 있다. 하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토착신앙이 생긴 지 수백, 수천 년이 지났는데도 왜 여전히 사찰과 교회에서 그렇게 ‘기복’을 하는 걸까?

나는 이게 단지 전통의 잔재라기보다는, 인간의 본능적인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본다.

나이든 어른들도 어린아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무서운 일을 겪었을 때, 한밤중에 괜히 불안해졌을 때, 내일이 두렵고 갑자기 배가 아플 때, 그들은 할머니의 손길을 찾는다.

할머니는 그런 손자/손녀를 안아주며, 그 아이가 느끼는 막연한 두려움이나 괴로움을 대신 해결해주겠다고 약속한다. 무서운 꿈에 나온 귀신이나 호랑이를 혼내주고, 손을 얹어 아픈 배를 쓰다듬으면 신기하게도 그 통증이 사라진다.

실체야 어찌 되었든, 마음의 불안이 사라지면, 우리는 같은 효과를 경험하게 된다. 귀신은 더 이상 꿈에 나오지 않고, 배 아픔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잦아든다.

기도란 것도 마찬가지 아닐까. 내 마음속 모든 고통과 시름을 ‘기도’라는 형식을 통해 그분께 쏟아붓는 순간, 그분의 존재는 할머니의 품처럼, 따뜻한 손길처럼 나의 불안을 진정시키고 내 고통을 가라앉히는 역할을 한다.

나는 한동안 너무나도 ‘이성적’으로만 생각해왔다.

‘이 종교는 원래 기복 신앙이 아니었는데, 왜 여기 와서는 기복하는 걸까?’ ‘기도한다고 정말로 뭔가 이뤄진다고 진짜 믿는 걸까?’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질문은 너무나도 인간적인 맥락을 놓치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존재가 누구든 간에, 내 이 깊은 불안과 고통의 바다에서 나를 건져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나에게 최고의 종교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일단 그렇게 ‘믿게’ 되는 순간, 그 믿음은 종교적 신념이 된다. 그 믿음은 각자의 종교적 자유로 이어지는 것이고, 그 누구도 그 신념을 함부로 폄하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실 내가 말하고 싶었던 건 “나이든 어른들도 결국은 ‘할머니의 손길’을 필요로 하고, 그 역할을 지금 종교가 대신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그걸 이제야 알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쓰다 보니, 결국 또 지극히 보편적인 이야기로 흘러가게 된다. 너무도 당연하고, 흔하고, 뻔한 이야기. 그런데 그런 이야기일수록 어쩌면 더 진실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가끔, 어쩌다 한 번씩 종교 모임에 찾아가곤 한다. 내가 나 자신 안에 깊이 침잠해 있거나, 부정적인 생각에 잠식되었거나, 홀로 고립된 느낌이 들 때— 그럴 때면 나는 스스로도 모르게 그런 공간을 찾게 된다.

그런데 늘 그곳에 가면 “그분을 영접하셨나요?” 혹은 “아직 그분을 영접하지 못하셔서 그러신 겁니다.” 라는 말을 듣게 된다.

그럴 때면 문득, ‘내가 여기 왜 왔지? 나한텐 자격도 없는데…’ 하는 생각이 스며들고, 또다시 조용히 발길을 돌리게 된다.

그 말은 마치, 할머니와 이미 영접을 마친 ‘선택받은 이들’만이 그 따뜻한 손길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뜻처럼 들린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오가는 이야기들은 때때로 마치 ‘검증된’ 할머니의 손길, 명품 메이커의 할머니 손, 그런 명품 매장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만의 자격 조건을 전제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 ‘자격’이 대체 무엇인지 나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쩌면 그들 역시 스스로가 선택받은 존재라 믿어야 삶의 버거움을 견딜 수 있기 때문이겠거니… 하고 생각하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하고, 그 실수로 인해 넘어질 수 있다. 아니, 사람이기에 실수하고, 사람이기에 넘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나이든 어른이든,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든 마찬가지다. 넘어지면 누구든 아플 수밖에 없다. 어른이라고 해서 그 고통이 덜한 것도, 어린이라고 해서 그 아픔이 가벼운 것도 아니다.

그래서 어른에게도, 어른이기에 더욱, 넘어짐의 고통에 대한 위로가 필요하다. 다시 일어서서 걷고, 어쩌면 더 힘차게 뛰기 위해서. 왜냐하면 넘어지는 것이 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살아가다 보면, 실수하고 넘어지는 일이 흔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시선은 너무도 차갑다.

마치 한 번도 넘어져본 적 없는 사람처럼, ‘그러게 조심했어야지.’ ‘그러니까 잘했어야지.’ 하는 말들이 날아온다.

세상에는 여전히 스스로 삶을 멈추는 사람들이 있고, 마음이 아파 병원을 찾는 이들도 셀 수 없이 많다.

물론, 이 모든 현상을 ‘그들이 할머니의 손길 같은 위로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사람이 사람의 따스함으로 사람을 치유할 수 있다면, 이 비극의 수는 분명 더 줄어들 수 있지 않을까.


나의 오래된 습관은 늘 같은 패턴을 반복한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가도, 막상 다시 일어서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또 다시 달리기 바쁘다.

마치 무릎이 까져서 울며 들어온 아이에게 약을 발라주고 밴드를 붙여주자마자, 그 아이가 다시 밖으로 튀어나가는 모습처럼.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엔 반대쪽 무릎이 까진 채 다시 돌아온다. 우리는 이것을 ‘윤회’라고 부른다. ‘중생의 삶’이란, 바로 그런 끝없는 윤회의 반복 안에 갇힌 삶을 뜻하는 것이다.

아이의 성장을 떠올리면, 넘어지고 다치고 울고— 그런 순간들을 수없이 겪고 나서야 조금씩 덜 넘어지게 되는 것 같다.

아픔 위에 또 다른 아픔이 덮이며, 시간이 흘러가고, 그 고통들이 켜켜이 쌓이면서 비로소 삶의 균형이 생겨나는지도 모르겠다.

비록 어리석은 중생일지라도, 같은 실수를 수도 없이 반복하다 보면 언젠가는 그 윤회의 고리에서 아주 조금쯤은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때마다 따뜻한 할머니의 손길 같은 위로가 내 곁에 있다면, 비루한 중생의 삶도 이렇게나마 계속 이어갈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