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이란 capacitive system...

생각보다 감정적으로 받은 스트레스는 나름 꼬리가 제법 긴 편이다. 재미삼아 최근에 이런 저런 아날로그 회로를 들여다봤기 때문인지 감정이란 시스템에 대해서도 이렇게 얘기할 수 있게 되었나보다 하는 것이다.

capacitive system이라고 말한 것은 capacitor가 들어있는 시스템이란 소리다. 뭔가 capacitor에 전하가 쌓이는 그런 시스템은 응답도 느리고 꼬리도 길다. 사람의 감정 시스템이라는 것도 용량성 특징 (=뇌에 쌓인 기억)이 있어서 제법 오래 가는 거다.

어떤 사람이 정말 어쩌다 한 두 번 내 눈 밖에 나는 행동이나 말/태도를 보였다고 해서 곧바로 화가 나거나 기분이 나빠지지는 않는다. 어느 수준 이상으로 올라가게 되면 볼때마다 불편한 감정을 갖게 된다. 불편한 패턴을 여러 번 보게 되면 마침내 불편한 상황에 이르게 된다는 거다. 어느 정도 기분을 가라앉혔다고 하더라도 이게 쉽사리 사그라들진 않는다. 제법 여운이 있다.

나는 어제 오전에 누군가로 부터 강한 스트레스틀 받기 시작해서 오후 내내 고통을 받았는데, 이 단계에 이르기 까지 최소 2-3개월의 불지핌이 있었다. 이젠 그 사람을 직접 대면하지 않고 단지 이메일로 날아온 글자만 봐도 급격히 불편해지는 기분을 감출 수 없는 정도다. 나란 사람이 누군가에게 한번 크게 맛이 가면 그 이후는 안좋은 감정들이 활활 타오르다가 한판 붙거나 아니면 물리적으로도 격리하거나 격리되었던 경험들이 꽤 있다. 1년 내내 참아보려고 애쓰다가 마침내는 회사를 관둬버렸던 적도 있으니까. 물론 100% 이 이유 때문인 건 아니었지만.

오늘은 토요일이고 날씨도 엄청나게 좋은 날이지만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 불쾌함을 지울 수 없다. 더구나 그 인간이 메일을 또 보내와서 그런 이유도 있다.

나는 인간에게 받는 스트레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은 마음으로 마음 공부 서적도 많이 보고 강연도 수 없이 보고 1년간 참여하는 온라인 과정도 들어봤다.

얻은 결론은 ‘사람은 생긴 그대로 살게 된다. 냅둬라.’ 이거다. 그냥 내가 그런 사람인 줄 알면 그냥 그렇구나 하면 된다는 거다. 내가 그렇다가 아니라 그렇게 가르치고 그렇게 배웠단 말이다. 괜히 내 감정을 분석해 내려하거나 어떤 틀에 강제로 밀어넣어보려고 하는 짓을 하면 나만 힘드니까.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도 않을 뿐더러. 또 세상에 이런 사람 나만 있는 게 아니니까 너무 답답해하지 말라고.

싫은 사람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은 없다. 내가 내 안에서 고통받는 만큼 돌려주고 싶은 생각도 들어오지만 역시나 생각의 세계 속에 머물게 해야 한다.

20대에 그런 식으로 폭발해서 다신 안보게 된 관계가 몇 있다. 폭발 안했다고 해서 다시 봤을 리도 없지만. 신기하게 일단 거슬리는 단계에 등극된 사람들과의 관계는 길어지면 길어질 수록 결국 그런 식으로 갔다. 집, 학교나 직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끌어안고 가는 관계가 되면 사실 폭발하지 않을 선택의 폭이 꽤나 낮아지는 거다.

전기 회로 같으면 capacitor가 터지면 사실상 회로가 단절되니까 (뭐 재수없으면 shortcircuit이 될 수도) 폭발할 때 까지 내버려두면 상황이 알아서 종료되겠지만, 인간은 좀 그렇지가 않다. 누군가에 의해 감정의 저수지가 터져서 분노가 하염없이 쏟아져 나왔다 하더라도 또 언젠가는 다시 차오르고 터지고 한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고 했던가? 지극히 동의하는 바다. 내가 누군가에게 제공했던 인간으로서의 선의나 환대에 대한 응답이 뭣같이 돌아오면 신기하게도 이런 저런 방법으로 착한 척하는 평소의 내가 아닌 또 다른, 악역 담당의 내가 되갚아주는 경험을 꽤나 여러 번 했다. 그것도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라도 결국엔.

이래서 누군가에게 원한 살 짓을 하지 말라고 했나 싶기도 하다. 원한 살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억지로 참고 잘해주려고 하지 말고 비록 차갑게 보일지는 몰라도 적당한 수준에서 선을 긋는 것도 나름 의미있는 결정이지 싶다. 미안한 말이지만 나와 그 사람은 그런 인연으로 만나게 된 것일 뿐이다. 좋게 바꾸려한다거나 스스로 달라지길 기대한다? 그것은 나의 착각일 뿐이다. 그렇게 할 수 밖에 없게 태어나고 자란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