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닫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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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해서 AI와 함께 최근에 벌어졌던 일들을 복기해봤다. 뭐랄까 온고이지신?이랄까.
AI는 참혹하게도 나의 과거를 나르시시스트에게 이용되던 삶으로 진단했다. 관련된 토론을 1주 넘게 해오다보니 나름의 흐름이나 문맥이 읽혀졌다.
처음엔 굉장히 놀라운 사실이었지만, 지금은 그냥 아무렇지도 않은 사실로 인식되고 있다.
돌이켜 복기해보면 특별히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경험. 그것이 누군가의 비참한 자기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에 도달하고 보니 이 모든 게 나의 불필요한 공감능력, 누군가를 돕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일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그렇게 긍정적이지 않다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지만.
모든 일들은 다 이미 지나간 일이니 앞으로 나아가야한다 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정리가 덜 된 상태로 무조건 나아갈 수만은 없으니 복기에 복기를 거듭하게 될 뿐이었던 거다.
‘Vulnerable Narcissists….’
살아오면서 마주친 사람들 중, 내가 머물던 영역 안에는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나르시시스트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웅대한 나르시시스트도 더러 있었지만, 대부분은 취약한 나르시시스트들이었다.
그들의 특징을 일일이 나열하지 않더라도, 내가 그들과의 관계에서 느꼈던 불편함을 떠올려보면 대체로 공통점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과 관계를 맺었던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그 성향은 단순한 의심 수준이 아니라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찾아본 결과, 나르시시스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의 실제 모습이 이론적으로 알려진 전형과 100%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특성 중 일부를 지닌 사람들이 꽤 많다는 점은 분명했다. 물론 “모든 사람은 어느 정도 나르시시즘을 지니고 있다”는 말처럼, 그것이 완전히 비정상이라고만 볼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이들이 스스로를 내면적으로는 나약하고 초라한 존재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기 인식을 방어하기 위해, 비정상적인 심리적 방어기제, 즉 나르시시스트적 특징을 보이게 된다.
그들과 대화하다 보면 은근한 특권 의식이 느껴진다. 그런데 그 특권 의식의 근거는 의외로 생뚱맞고, 타인에게서 받은 인정이나 선택 같은 사소한 경험에 기초하고 있다. 그들의 기억 속 ‘특별한 사건’이란 결국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사람에게 인정받았다”, “잘난 사람에게 선택받았다”는 식의 이야기들이다.
즉,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정도로 괜찮은 사람이므로, 특권을 누릴 자격이 있다.”
이런 식의 자기 합리화를 통해,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자신을 보호하려는 것이다.
결국 그들의 자기 인식은 왜곡되어 있고, 그 왜곡을 유지하기 위한 근거 또한 철저히 주관적이다. 그래서 그 근거를 끊임없이 만들어내야만 한다. 이들에게 인간관계란 바로 그 근거를 공급받을 때만 의미를 갖는다.
내가 가장 문제라고 느끼는 점은, 이들이 타인으로부터 받는 호의를 자신의 ‘특권’의 당연한 결과로 해석한다는 것이다.
즉, 누군가가 진심 어린 마음으로 선물을 건넸을 때, 그것을 “그 사람이 나에게 고마움을 표현했다”고 받아들이지 않는 대신, “나는 훌륭하고 특별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들은 나에게 마땅히 조공을 바치는 것이다”라고 여긴다.
결국 타인의 호의조차 그 사람의 마음이 아니라 자신이 부여받았다고 믿는 특권의 연장선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나는 진심의 표현으로 보여준 호의가 응당한 대가, 앞으로는 더 많이 받아야 할 대가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회사 생활 하는 도중 만났던 조직장이라고 완장 찬 인간들은 대부분 나르시시스트의 소양을 잘 갖춘 인간들이었다. 어쩜 그렇게 잘도 뽑아다놨는지 신기할 정도로.
말 그대로 ‘돈’이 아쉽고 대안이 없어 회사를 다닐 땐 어떻게든 깊게 얽히기 싫어서 피해만다니다가,
마침내 이직할 시점에 어쩔 수 없이 ‘퇴사자 면담’이란 과정을 진하게 겪다보면 이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알게 된다.
다행스럽게도 ‘퇴사자 면담’의 상황에서는 더 이상 ‘눈치’ 볼 일 없게 되었으니, 그동안 쌓인 나의 불편함을 이 ‘취약한 나르시시스트’ 들에게
나 스스로 놀랄 정도의 차분함을 가지고 논리적으로 또박 또박 진정한 ‘실력자’의 위치에서 시원하게 토해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달까.
씁쓸하지만 왜 당시 조직장이라는 이들이 하나같이 전부 나르시시스트적인 성향이 강했는지도 쉽게 미루어 알 수 있다.
상급자의 인정을 공급으로 삼아 하급자들을 착취해야 살아갈 수 있는 이들이 바로 그들이기 때문인 거다.
정상적인 심리가 작동하는 이들은 쉽게 말해 ‘만년 과장’의 이미지? 그저 사람 좋은 부서장에 불과할 뿐,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처절하게 성과를 내고 (=처절하게 부서원들을 굴리고) 능력을 펼치는 뛰어난 능력자 (=과장된 자기인식)는 될 수 없으니까.
‘Narcissists are everywhere….’
왜 나는 나르시시스트들과 깊은 관계를 맺게 되었을까, 왜 특별히 내가 바라보는 세상에는 이렇게 나르시시스트가 유독 많다고 느껴지는 것일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이제 와서 알게 된 답은 나르시시스트든 뭐든 누군가에게 이용당하는 대상도 다들 그들 나름의 취약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취약성이란 게 역시나 부정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으니 다르게 돌려 말하면 그냥 특징 (traits)인 것이다. 말과 행동으로 드러나는 특징.
이 모든게 인간들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구리구리한 냄새를 풍기면 파리들이 모여들듯이 취약성을 가진 모습을 드러내는 이들 앞에는 그들을 이용하려는 자들이 나타날 수 밖에 없다.
심리적/육체적 취약성 그것이 피해자를 만들고 가해자를 만들어낸다.
몸이 약한 이들이 그들보다 힘이 센 이들에게 이용당하듯, 돈이 궁한 이들이 그들보다 많이 가진 이들에게 이용당하듯 말이다.
가해자 또한 가해자들 나름의 취약성이 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듯이. 또 다른 가해자는 그들의 취약성을 통해 이용한다.
그것이 표면적으로는 ‘이용’, ‘착취’란 부정적인 느낌의 단어로 표현될 뿐이지, 그것은 그저 인간들의 상호작용인 것이다.
더러는 불법적인 모습으로 더러는 합법적인 모습으로 더러는 드러나게 더러는 은밀하게.
나는 자타 공인 착한 아이로 살아온 경력이 화려하다. 그렇다보니 나와 가까웠던 사람들도 일부를 제외하면 다들 착한 아이들로 살아온 전적이 뚜렷한 이들이다.
‘착한 아이’ 라는 말 그 자체로 취약성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을 아주 강하게 풍긴다.
그 자체가 나르시시스트를 간택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취약성을 보여주기에 그들의 배우자들은 거의 대부분 나르시시스트의 성향을 강하게 드러낸다.
그러니까 나와 가까운 이들 중에서 평소 집안 문제로 신경쓰며 살지 않던 이들은 대개 결혼전에도 건강한 경계를 가지고 주체적으로 살아가던 일부에 불과했다.
나처럼 결혼 하기 직전까지 부모님과 함께 거주하며 착한 아이로 살아오다가 결혼해서 분가한 이들은 대부분 비슷한 삶을 살았다고 해야할까.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내가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닌 입장에 서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면, 가해자와 피해자의 패턴을 분석하여 학습하고 나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면밀히 분석해 봐야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답변은 나와 같은 사람들에겐 꽤나 쉽게 나타난다.
'나와 타인과의 심리적/물리적 경계를 잘 유지해야한다.'
그런데 난 이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도대체 ‘경계’란 게 무엇인지.
난 여태 이 ‘경계’에 취약했다. 나의 삶의 다양한 경험을 통해서 나는 수 많은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나의 경계가 침범 당해서라는 생각을 못 해봤다.
다른 이들 또한 자신의 경계가 누군가에게 침범 당하는 고통을 받고 살고 있었지만, 그것이 그들의 입장에선 늘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었을 뿐이다. 그러니 내가 불편한 것도 당연한 것이 된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경계를 쉽게 침범 당하는 이들은 타의 경계도 쉽사리 넘나들 수 있는 것으로 인식한다. 피해자가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어 낸다.
엄마의 말은 무조건 잘 들어야 하고, 선생님의 말씀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며 따르며, 상관의 지시에 복종하며, 어려운 사람을 만나면 도와줘야 되고, 친밀한 관계에서는 나의 영역을 열어주어야 하고, 가장이 되면 가족 구성원 모두의 문제를 해결해줘야 하고, 배우자가 되면 상대를 위한 아낌없는 지원을 해야 하고…
이 모든 것은 내가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기꺼이 할 수 때로 한정된다. 나와 그들의 이익이 같은 방향일 때. 만일 그렇지 않아서 내가 불편감을 느낀다면 그것은 이렇게든 저렇게든 내 경계가 침해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당하게 말 하자.’
불편함을 느꼈다면 확실하게 표현하자. 상대방의 입장에서 미리 생각해보고 배려할 필요가 없다.
누군가 무심코 혹은 일부러 내 발을 밟았는데 그래서 내가 불편함을 느끼고 있는데, 단지 그 사람이 상처받을 게 두렵다는 이유로 계속 밟혀있고 싶은가?
그 누군가가 가족이든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든 지적하고 그 상황에서 벗어나야 한다. 왜 나를 위해.
그들의 문제는 내가 해결해줘야 하는 문제가 아니다. 내 것을 불편한 마음으로 그들과 나눌 수는 없다. 나와 타인의 목적이 다를 때 그의 목적을 이루는 수단이 된다면 나는 불편해질 수 밖에 없다.
이 순간만, 오늘만 잘 넘기면 되겠지 싶지만, 이 순간이 24시간이 되고, 오늘이 매일이 된다.
불효자가 되고 불량학생이 되고 몹쓸 놈이 되고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 관계가 단절되는 한이 있더라도 누군가와 불편함을 참아가며 유지되는 관계라면 더 이상 지속할 이유가 없다.
결국엔 폭발하여 급 단절될 관계를 당장의 이익과 나의 정서적 에너지와 교환하며 살아가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