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톨스토이의 매우 짧은 이야기들인데, 간결한 이야기로 삶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특징이 있다. 제목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인데 영문제목을 보면 ‘사람은 무엇에 의하여’ 혹은 ‘무엇에 따라서 사는가’라기 보단 ‘사람이 따라 사는 것’, 즉 멀쩡히 잘 살아가기 위해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쓴 책이라고 봐야지 싶다.

이 중에 ‘신’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는데, 공자에게 배운다는 동양인이 신과 관련된 문제를 한방에 정리해버린다. 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관점에 빗대어 얘기한다. 선천적인 맹인은 빛을 본 적이 없으니 해가 없다고 할 것이고, 산촌에 사는 사람은 동쪽 산위에서 산이 떠오른다고 할 것이고, 바다에 사는 사람에겐 동쪽 수평선 위에서 해가 떠오르고 하듯, 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관점은 저마다 다를 수 밖에 없기에 그 문제로 다툴 일이 없다는 것이다. (어쨌든 신은 분명히 존재한다는 가정이다)

사람의 얼굴도 어느 각도에서 어떻게 바라보았느냐에 따라 다 달라질 수 있을 뿐더러, 오죽하면 뇌과학자들이 이야기 하듯 눈으로부터 받은 신호가 뇌안에서 재가공되어 우리가 인식할 지경인데 그들 모두가 바라보는 것이 하나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것도 웃긴 일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찌된 일인지는 모르지만, 이것을 읽으며 ‘부처님의 광명’이 떠올랐는데, 어쨌든 이 이야기에서는 짧은 이야기로 일거에 정리가 되는 것을 가지고, 지금까지 사람들이 얼굴만 맞대면 싸우고 반목하고 있는 것을 보면 사람이란 존재가 그렇게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이구나 생각될 뿐이다.

예수가 이땅에 다녀간 것도 2000년이 넘은 이 지경에서 동네 교회에 가서 그런 사실을 인정하는 말 한마디라도 한다면 졸지에 반역자라도 된 듯한 대우를 받겠지 싶은 생각도 든다. 그러나 세상을 오래 살고 수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하면 각기 이름만 다를 뿐이지 그 전지전능한 존재, 아니 그 존재 이상의 것은 하나일 것이란 생각은 늘상 들게 된다.

어떤 사람은 이 경우를 빗대어 하나의 스타를 놓고 다양한 팬클럽이 생겨나서 누가 정통이냐 주장하며 물고 뜯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하는데, 이것에 나도 크게 동감한다.

예전만 해도 더러 똑똑한 사람들도 있고 어리석은 사람들도 있겠지, 그렇지만 어리석은 사람들이 대다수를 이루고 있는 것이 세상이지 했을텐데, 지금은 이런 말을 쓰고 있는 나를 포함해서 ‘인간이란 모두 어리석다’라는 생각으로 종합되고 있다. 난 좀 다르겠지 난 좀 덜 어리석겠지 하지만 매일 매일의 삶을 스스로 생각하면 여전히 어리석고 여전히 짧고 좁은 시야를 가지고 좁은 틀에서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을 뿐이란 것을 알게 된다. 다만 예전처럼 나의 생각이 틀림이 없는 확고한 것이다라는 정도만 많이 낮아졌을 뿐.

세상이 지금처럼 오픈되지 못한 지경에서는 그저 자신의 치부를 잘 가리기만 하면 적당히 스스로가 어리석지 않고 현명한 사람이다라고 포장하며 살 수 있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털어서 먼지 안나는 사람 없다’라는 말이 더 잘 와닿을 정도 아닌가? 오히려 우리가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사회 계층 - 그것은 주로 가진 것이 어느 정도냐에 의해 평가 되고 있지만 - 이 높으면 높을 수록 그 어리석음과 악날함의 정도가 더 심하다는 것까지 알고 있다.

도덕이니 철학이니 삶의 문제의 옳고 그름을 생각하는 것도 내가 속해있는 사회계층이 지극히 낮다는 것을 의미하고 바로 그 ‘현생에서의 모자름/무능력함’을 정신적으로 만회하기 위해 나는 오늘도 삶의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많이 가졌고 또 많이 해쳐먹었고 아쉬울 게 없다면 삶의 문제에 대해서, 철학적인 문제에 대해서, 정신적/육체적 건강에 대해서 생각할 이유가 없을 것 아닐까?

나는 가끔 생각한다. 평생 아무리 애를 써도 다 쓰고 죽을 수도 없는 엄청난 부를 이루었는데, 여전히 더 가지려해서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고 하는 것도 다 ‘부지런 함’ 때문이 아닐까하고 말이다.

나 같으면 이것 저것 다 접고 세계의 좋다는 곳이란 곳엔 다 가서 마음의 평화를 누리며 살려 할 것이다. 뭔가 더 가지려 하면서 스스로의 마음을 해하려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열심히 벌어 모아도 몇 년 먹을 거리도 되지 않는 나에겐 평생도록 일하라는 운명이 지워진 것을 받아들이고 그냥 살아야지. 할 게 없어서 혹은 하고 싶은 게 없어서 괴로운 것보단, 어떻게든 해야 살 수 있기 때문에 ‘해야 한다’ 하는 운명이 나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일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한다면 뭘 해야할지 고민하고 선택할 필요는 없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