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참 엿 같네...라고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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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자의 입장에 서서 누군가의 인생에 대해서 자신이 살아본 적 없으니 아무렇게나 생각하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고의라고 보기 보단 무지에서 오는 것이니까. 그러나,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자신이 주인이 된 입장에서 그렇게 말한다는 것은 그 스스로가 가치없는 인간이고 그러니 그 인생도 그럴 수 밖에 없구나 인정하는 꼴이 되는 것이다. 그 스스로가 그렇게 만들어버린 것이니까. 수만가지 이유로 그러할 만한 사정이 있다고 한들, 또 아예 자포자기 하는 심정으로 ‘그래 그렇다 난 원래 그런 놈이야’라고 해봐야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저 막연히 억울하고 인정하기 싫은 것을 인정해야 하는 사실만이 그를 괴롭힐 따름이다. 그 누가 그것을 알아준단 말인가? 모두 자신이 감수할 몫이다.
자의든 타의든 인생이 엿 같아졌어도 내 인생이고 보면 남은 인생을 살아내는 것도 나의 몫이고 덜 엿 같게 가꾸어 나가야할 것도 내 몫이다. 아무리 노오력해도 좋아질 것 같지 않아서, 너무 절망적이어서 누군가의 도움을 요청하려 해도 그 주체는 나다. 내 인생의 이야기는 써내려가고 있는 중이니까 지금의 이 순간은 내가 하기에 따라서 아직 발단일 수도 있고, 전개일 수도 있고, 위기 절정 결말 중 어느 상태일 수 있을 것이다. 기왕이면 지금의 절망적인 상태는 기왕이면 앞 부분이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좋아질 기미가 있는 것이니까. 나이가 아주 많이 들었어도 기왕이면 제2 혹은 제3, 제4의 인생이란 것도 만들어내서 일부러라도 지금의 상황이 발단이나 전개쯤 와있길 바랄 것이다.
그렇게나 뭔가 좋아질 기미가 있거나 좀 더 나아지는 것 같다면, 또 희망이 보이는 것 같다면 그 탄력을 받아 더 잘 살아볼 수 있을텐데, 그렇지 않고 지금의 이 상황은 절정을 지난 아니 결말에 이른 지경이라 인생은 비극의 최종 결말을 향해 가고 있다고 보면 이미 끝난 이야기가 된 것이니까 더더욱 개선하려는 동기 부여는 일어나지 않고 ‘될대로 되라’에서 ‘아예 얼마나 더 폭망할 수 있을지 갈 데까지 가보자’란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아니 그냥 이 모든 것이 남의 이야기가 되었음 하기에 내 삶은 어디간 것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남의 삶을 엿보며 부러워하고 가상의 삶 속에 빠져있길 선호하는지도 모른다.
하루 24시간이 나에게 주어졌지만, 그 중에 삶을 유지하기 위한 시간 - 넉넉 잡아 10시간으로 잡아주고 - 여기에 밥벌이를 위해 써야 하는 시간 12시간을 잡아주면 고작해야 남는 시간은 2시간 남짓이다. 그 시간도 드라마 보기와 같은 가상의 삶에 빠져있는 시간으로 낭비하면 진정 내 삶을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은 없다. 마치 내가 게임을 잘 못하니 그 게임의 고수가 스트리밍하는 방송을 쳐다보며 응원하고 있다든가 황폐화된 우리 집안 사람들이 보기 싫으니 유튜브로 방송되는 남의 집 가족사를 매일 같이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 거울로도 들여다보기 싫은 황폐화된 내 몸은 어딘가로 없어져버렸음 좋겠고 몸짱 형아들의 방송을 매일 같이 들여다보며 대리만족을 하며 살고 싶은 것이다. 날 위한 삶의 시간은 주어졌지만 남의 인생을 관전하면서 탕진하는 것이다. 내 삶은 마치 안 맞는 옷처럼 입으면 불편하고 내 옷이 아니란 거부감만 들 뿐이니까. 차라리 버릴 수 있다면 버리고 싶고 바꿀 수 있다면 새것으로 바꾸고 싶은 지경이니까.
이미 망가져버렸다 싶은 가망 없다 싶은 내것을 온전한 것으로 되돌리는 게임이야 말로 평생을 두고 도전해 봐야할 진정한 게임 아닐까? 어차피 게임 고수들은 내가 아니라도 응원해 줄 사람이 많고 그 사람은 내가 걱정해주지 않아도 자신의 삶을 잘 꾸려갈 것이다. 그렇지만, ‘내 것’들은 내가 아니면 온전하게 더 나아가서는 자랑스럽게 만들어줄 이가 없다. 억울하고 꼴도 보기싫은 ‘내 것’들 대신 당장에 부러워보이는 그 ‘남의 것’들 내가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고 나서도 내내 부러워하고 갖고 싶어할까? 그런 마음만 있다고 ‘내 것’이 그처럼 탐스러워 보이는 ‘남의 것’들처럼 될까? 잘 될 가망성은 1도 없다 하더라도 차라리 내 시간을 내 것을 아주 조금이라도 좋게 바꾸는 것에 투자를 하면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면 그나마 지금 보단 나은 것이 되어있지 않을까?
엉망인 것을 갑자기 좋은 것으로 만들려면 노오력에 노오력을 해야하고 그 노오력에 필요한 수고스러움 때문에 매일 매일 녹초가 되어 정말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것이 되어버릴지 몰라도 목표를 크게 낮추더라도 꾸준히 하겠다는 생각으로 하면 되지 않을까? 어차피 그래봐야 대리 만족하면서 살다가 없어질 시간이지만, 또 어느 순간 나의 그 수고들이 무색하게 다 와르르 무너져버릴지라도, 또 내가 갑자기 세상에서 없어져버릴 지라도. 적어도 난 (남의 이야기를 듣고 보고 하는 대신) ‘내 인생을 살았네’ 할 수 있을테니까 말이다.
비록 해도 해도 안되서 폭망한 인생의 이야기를 쓰게 되더라도 적어도 남의 인생이나 좇다가 끝나진 않았다 할 수 있는 것이나까. 내 삶이지만 그것을 위해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무책임한 삶의 주인이란 비난은 적어도 피할 수 있을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