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는 어렵다..(4)

인생을 통해 가야하는 종교의 길을 그분과 아무런 소통없이 가야한다는 것은 참으로 무의미한 일이 아닐까 한다. 그분이 현존하시는 것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분과 대화를 나누지 못한다. 그분의 현존을 느끼지 못한다. 그것은 그분이 현존한다고 말로만 아는 척하고 있을 뿐 정작 믿지는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분이 현존하는 것을 믿는다고 하는데 그분을 느낄 수 없고, 인격대 인격으로 교제하신다는 그분과 대화를 나눌 수 없다면, 아니 아예 그런 일이 가능하지 않다고 애초부터 포기한다면 그분이 안 계신다고 믿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적어도 그분이 현존하고 계신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셨듯 내 그 분안에 거하고, 그분이 내 안에 거하고 계신다면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모르실 리 없고 내 마음을 모르실 리 없다. 전지전능하시고 우주 만물을 관장하시는 분이 누추하기 짝이 없는 내 안에는 거하지 아니하신다 하여도 능히 알 수 있으셔야 한다. 그래서 내가 가만히 비탄에 젖어있거나 슬픈 얼굴을 하고 있다면 내 마음 아시는 그분이 날 어루만져 주시고 위로하며 다시 일어날 힘을 주셔야 한다. 그분이 그토록 나를 사랑하신다는데 사랑하는 대상에게 어찌 이럴 수 있는 것인가? 더구나 이 세상에 티클만큼도 안되는 나 하나 위로하는 일은 그분의 놀라운 권능에 비하면 정말로 너무나도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일 수 있다. 그런데, 여태 나의 삶의 경험으로 보면 그분이 내 아픔 아시고 내 아픈 곳을 어루만져 주시며 날 위로하시는 것을 내가 직접 느껴 알게 된다면 그것은 이 세상 어느 기적보다도 놀라운 기적일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내가 느끼게 된다면 정말로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기에 그동안 몰라 뵌 것을 사죄드리고 온몸을 다 해서 사랑하고 그분을 흠숭하고 찬미할 수 밖에 없다. 정말로 그러하다면 그분의 말씀은 도저히 거역할 수도 없고 그분 없는 매일 매일을 생각할 수도 없다.

그분과 함께하는 매일 매일이 될 수 있다면, 종교는 어려울 이유가 없는 것이다. 나를 한없이 사랑하는 존재와의 만남은 하루도 없을 수 없고, 그분을 소홀히 한다거나 배신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답답하고 힘들기만했던 내 인생은 더 이상 초라하지 않고 매일 같이 그분과 같이 하는 환희의 매일 매일 일 수 밖에 없다.

살아가는 시간이 피흘리는 고통의 매일 매일이 될 지라도 그분이 나와 함께 하고 나를 한없이 사랑해주고 계시는 이상 괴롭지 않을 것이고, 하느님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신 예수님이 그러하셨듯 죽어서도 다시 피어난다는 굳은 믿음이 있기에 죽음의 고통도 견뎌낼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내가 그분의 임재를 느끼고 확신해야 가능하다. 그분과 매일 매일 즐거운 대화를 나눌 수 있어야 가능하다. 골방에서 아무리 그분과의 연결을 시도하더라도, 여러 시간동안 묵상에 잠겨서 그분과의 만남을 요청해도 아무런 응답이 없다면, 이 기다림의 끝이 언제일지 계속 스스로에게 되묻게 될 수 밖에 없다. 그분과의 소통 채널이 이 세상 기독교 신자가 너무 많아져서 과부하 상태에 걸려서 내 차례가 돌아오려면 한참 멀은 것인가? 전지전능하신 그분의 통신 채널에서 병목현상이란 있을 수도 없는 일 아닌가? 결국 그분과 이야기 나누지 못하는 나는 내 자신의 영적 통신 장치에 문제가 있다고 밖엔 생각할 수 밖에 없다. 그분의 임재가 그렇게나 확연하고 쉽게 알 수 있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왜 난 그분을 전혀 느낄 수 없는 것인가? 나처럼 정상궤도에서 벗어나지 않고 살아오려고 노력했던 사람도 이 지경이면, 과연 세상 속에 그분의 정의는 어디 있는 것일까? 난 어쩌다 희소한 확률로 그분의 선택 밖에 벗어난 존재인 것인가? 길 잃은 양 한마리도 어떻게든 찾아 돌보시는 목자님이 어찌 날 모르실 수 있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