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일중독/번아웃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Written by
Ke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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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나름 회복기에 있는 상황이니까 이젠 말해도 될 것 같아서 적어본다.
내가 번아웃 상태에 있었는지는 나 스스로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와 가까이 지내던 사람이 나에게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기 전엔 말이다. 그리고 나서 난 하던 일을 거의 집어치우고 술과 카페인도 끊고 밤 9시에 무조건 잠을 청하고 눈 떠질 때 일어나는 생활을 1주일 넘게 하면서부터 내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이 증상은 너무 오래 지속되었기에 난 원래 그런 사람이구나 하고 살아왔던 모양이다. 대략 거슬러 올라가보면 3-4년 전부터 시작된 것 같으니까.
가장 두드러진 증상은 다음과 같다.
- 아침에 일어나서 메일함에 잔뜩 쌓여있는 메일들을 보면 화가 치밀어서 욕을 하며 시작하고 그것들을 어떻게든 빨리 처리해야 할 것 같은 강박에 시달린다.
- 자기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동료들에 대한 분노가 솟구친다. 어떤 경우엔 욕이 절로 나온다.
-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으면 no라고 하지 못하고 그것들을 어떻게든 처리해내느라 많은 시간을 소비한다.
- 깨어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일하는 것으로 보낸다. 일을 하지 않고 있는 날 볼 수가 없다.
- 커피를 심하게 마시고 일하다 짜증이 나면 맥주나 와인을 즐겨 마신다.
- 매일 매일 일 못하는 이들 때문에 치미는 분노와 스트레스를 줄이려면 이 방법이 최고다.
- 수면 시간은 대개 4-5시간 정도로 매우 낮은데 신기하게도 일상 생활은 가능하다.
- 일반적인 인간의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려 들지 않고 그게 다 내 능력과 노력이 부족해서 드는 생각이라 치부한다.
가장 큰 폐해는 다음과 같다.
- 나란 사람이 타인이 보기엔 정말 별 볼 일 없는 쓰레기만도 못하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어버린다. 뭘해도 자신감이 없어진다.
- 나는 미친 듯이 일하고 있는데 한심한 실력으로 나태하기 그지 없어 아무런 도움이 안되는 동료들과 지낸다는 게 너무 억울하고 내 인생은 늘 이 모양이 이꼴로 인정받지도 못하면서 온동네 잡일은 다해주는 호구란 생각이 든다.
- 누군가의 조언이나 충고를 들으면 어떻게든 그것이 나와 상관없는 것이라 합리화를 한다. (대개 논리가 희박하고 황당한 이야기를 할 때도 있다)
- 사람이 모여있는 곳에서는 스스로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주로 굳은 표정으로 있고 다른 사람들의 대화에 관심이 없으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뭔가 꺼내봐야 무의미하고 묵살당할 것만 같다.
-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 만큼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겐 과한 칭찬을 늘어놓고 그 사람이 나에게 그렇지 않은 것은 되려 아쉬워한다.
- 외출을 하면 사람들의 눈이 매우 신경이 쓰인다. 뭔가 허접하기 그지 없는 나를 안좋게 바라보고 안좋은 말을 건네올 것만 같다.
- 무엇을 하든 재미가 없기에 다시 일을 찾게 되지만 일 또한 잘 되지 않으면 스스로의 능력이 한없이 초라해지는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 뭔가 재미있는 것을 해야겠다거나 창의적인 생각, 하다못해 누군가와 건넬 농담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냥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자신의 짐을 지울 것 같아서) 싫어진다.
- 엄청나게 에민해진다.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호구인 나를 이용해먹기 위해 하는 것이라고 나쁘게 왜곡시켜 받아들이는 일이 많아진다.
- 돈 쓰는 것에 매우 민감해져서 별 것 아닌 지출도 크게 받아들인다.
뭔가 좀 회복이 되어간다 싶으면 위의 증상들이 약해지거나 사라지는 것을 느낀다. 전반적으로 삶이 느슨해지는 느낌이 있지만 생산성이 떨어진다거나 능력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일하면서 재미를 느끼게 된다. 얼마전까지의 내가 ‘정상’이 아니었다라는 사실도 점차적으로 깨닫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