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속 생각이란 다 무의미하다...

직관이란 게 있고 생각이란 게 있다라고 나누는 것 같다. 난 그 두 개가 별로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사람은 시간이 남거나 머릿속이 덜 복잡해지면 생각이란 걸 하고 산다. 내 생각만으로는 모잘라서 남의 생각을 얻어듣기도 하고. 그래서 뭔가 불확실한 게 좀 걷어지면 편안함을 느끼는 것 같다. 요즘처럼 수 많은 정보가 넘쳐나는 시절엔 더 그렇다. 좀 부지런히 움직이거나 뭔가 좋은 뉴스를 고를 능력이 있다거나 운이 좋다면 남보다 빨리 좋은 정보를 접해서 내 삶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인 거다.

그리고 또 남는 시간엔 생각이란 걸 한다. 그렇게 하면 좀 더 도움이 될까 싶어서.

뭔가 내 생각대로 세상이 돌아가지 않을 땐 훨씬 더 많은 생각을 한다. 어떻게 하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돌아가게 할 수 있을까 싶어서. 그게 뭔가 막힌다 싶으면 그땐 누군가에게 내가 원하는 걸 들어달라고도 하고 스스로를 내던져서라도 그걸 이루고자 하는 욕구를 강렬하게 드러낸다.

떨어져서 보면 욕구는 그저 욕구일 뿐이고, 세상은 그냥 세상일 뿐이다. 나의 욕구대로 세상이 돌아갈 리는 없지만 그렇게 만들고 싶어하고 그렇게라도 조금이라도 된다 싶으면 이내 안정을 찾는다. 그게 아니면 늘 불안하고. 더 안좋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고. 그렇게 쓸데없는 생각의 생각은 꼬리를 문다.

그렇게 살다가 뭔가 지치고 힘들어지면 ‘내려놓기’라는 걸 하겠다고 한다. ‘내려놓는다’라는 것은 그런 욕구를 내려놓는다기 보단 뭔가를 해서 내 욕구를 채우려는 노력을 그만하겠다라는 의미가 되는 듯 하다. 욕구가 솟아오르는 것은 어찌할 수 없다 하더라도 이루어질 수 없는 확률이 매우 높고 그래서 되지 않더라도 조바심내거나 집착하거나 하는 행위를 더 이상 하지 않겠다는 거다. 어차피 이루어지면 더 큰 걸 기대하고 또 더 큰 걸 기대하고. 안되면 안되는 이유를 찾으려 하고 의미를 부여하려 하고 나와 세상을 탓할테니까.

그러니까 그냥 생각이란 건 무의미하다. 없는 욕구도 만들어내고 그걸 이루려는 쓸데없는 아이디어를 계속해서 만들어낸다. 정작 나의 삶에 도움이 되는 생각들은 늘상 뒷전으로 밀린다. 그만큼이나 나의 머리 안에서는 나도 모르는 욕구의 우선 순위라는 게 있고 그 우선 순위에 따라서 생각이 솟아난다.

그래서 그런 마음을 어지럽히는 욕구들로 부터 멀어지기 위해서, 그러니까 수행을 하기 위해서, 아니 그쪽의 말을 인용하자면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출가라는 걸 하는 건가보다. 집에 있으면 쓸데없는 욕구가 자꾸 솟아나니까. 그 욕구는 나를 얾메이게 하는 욕구, 정작 내가 하고 싶어서 하려는 욕구이지만 장기적으로는 나에게 해를 끼키는 욕구와 멀어지기 위해서 말이다.

출가한 사람이 세상과의 연을 끊고 열심히 명상이란 걸 하고 절을 하고 말씀을 공부하며 마음을 비어있는 상태로 두려고 하는 것은 욕구란 게 생기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생각들로 머릿속이 어지럽혀지고 그것이 이루어지거나 이루어지지 않거나에 따라 또 다른 마음의 혼란함이 생기는 것을 피하려 함인 것이겠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많은 경험을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런 경험을 하는 동안 머릿속에서는 훨씬 더 많은 생각들이 피어나고 그 생각들과 경험은 훨씬 더 많은 가지들을 쳐 나가기 때문에 어쩔 때는 그냥 아무 것도 몰랐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 때를 떠올리면 그때는 그 때다운 잡념들로 머릿속이 가득했다는 것은 떠올려지지 않는 모양이지. 지금 생각하면 별 것 아니지만 그 땐 그때의 욕구와 걱정 근심 같은 게 있기는 했다. 나의 삶과 머릿속이 가벼워지지 않는 것이다. 어떻게 하든.

내가 가진 거의 모든 것을 잃고 나면 머릿속이 가벼워질까? 잃어버리고 남은 게 없어서 더 잃을 것도 없는 상태가 되면? 그 땐 그 나름대로의 생존의 문제를 고민할 거다. 다 잃어버렸지만 다시 가지려는 욕구에 시달리게 될 거고. 오히려 갖고 있었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그 때만큼으로 어떻게 빨리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궁리들을 하겠지.

운전을 하다보면 잠시 잡념에 빠져있다가 돌아오는 경험을 한다. 어떤 생각에 잠겼다가 깨나고 보면 나도 모르는 새에 먼 길을 지나와있다는 걸 알게 된다. 나는 인생은 그런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삶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랫동안 잠겨있는 그 잡념들에 불과하고, 태어나서 살게 되는 것은 잡념에 빠진 내가 사고를 내지 않고 먼길을 운전해오는 것과 같다고. 생존을 위해 필요한 기술이나 능력은 태어나면서 대부분 부여받았고 인간 세상에서 살게 되면 그것이 모자름이 없게끔 채워지니까 존재로서의 인간은 그렇게 자동으로 살아지게 마련인 거다.

과연 자연에 살고 있는 생물들에게도 이런 생각이나 잡념 따위가 정말로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하물며 그들도 잘만 살아가고 있는데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잡념과 욕구에 따르는 고통에 시달릴지라도 그렇게 살아가게 마련인 거라, 생존에 대한 고민 따위는 일단 접어도 된다. 아무리 많은 잡념속에 잠겨져 있다고 하더라도 생존에 지장을 초래하는 사건이 일어나면 그런 잡념들은 생존을 위한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는 순간에는 뒤로 밀려난다.

아무리 내가 나 자신을 관리할 줄 모른다 하더라도 다들 그렇게 잘들 살아낸다. 그러면 남은 것은 내가 사람으로서 갖는 욕구들, 그것들을 해소하기 위한 생각들이다. 불행히도 이런 게 굉장히 많다. 습관보다 더 깊은 단계로 들어가서 마치 그것들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마치 생존에 위협을 받는 지경에 이른 것 같은 불안함을 느끼기도 한다. 속세라는 곳에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이런 것 부터 털어내야 스스로가 자유롭고 행복해 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내가 인간으로서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 모두 만족되어 잡념이란 게 떠오를 수 있는 상태라면 그 이상의 욕심 따위를 갖지 말아야 한다고 말이다. 세상은 정말 좋아졌다. 그리고 매일 매일 좋아지고 있다. 그 방향이야 어떻든 당장의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좋아지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좋아지는 만큼 기대하거나 바라는 정도도 점점 높아져서 그 끝을 모를 정도가 된다. 그런 것도 모르고 그 높아진 기준을 만족하지 못하는 나와 남과 세상을 탓하면서 괴로워한다.

적어도 좋아지는 정도에 맞추어 나의 행복의 정도를 계량하자면, 나는 매일 매일 행복해야 한다. 그런 세상에서 살았으니 당장에 죽어도 여한이 없어야 한다. 그렇게 좋은 삶을 오래 만끽해왔으니 이제 그 삶을 누려온 몸이 늙고 병들어 가도 억울해 할 게 없다. 아무 것도 없이 태어났는데 매일 매일 좋아지는 삶을 살아왔는데, 사는 동안 대부분의 시간은 즐거웠는데 또 더 뭘 원한단 말인가. 무병장수/불로장생이라도 하겠단 말인가? 사람들은 다 내말을 따르고 나를 좋아하고 나를 존경하며 나의 행동 하나 하나에 의미를 부여해서 감탄하고 찬사를 보내며 나의 모든 것에 매력을 느끼며 사랑을 해줘야 하는 것인가? 운 좋게 이런 능력을 하나 이상 갖게 되었거나 노력을 통해서 얻게 되었다면 그 역시 감사하고 행복해 해야 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아도 그만이고 차라리 그런 게 없는 게 더 자유롭고 편안하다.

어차피 살아야 하는 거라면, 그것도 (특히 정신적) 고통이란 것을 받지 않고 살아가려 한다면,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에만 온전히 나를 내어줄 뿐, 그외에 나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특별할 것도 없고 특별하지 않을 것도 없는, 봄날 들판에 나가 있는 나에게 불어오는 바람 정도로 생각하면서 살면 그뿐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다 살면서 태풍을 맞아 모든 것을 잃기도 하고 시원하면서도 잔잔한 바람에 즐거움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나란 사람을 절망에 빠지게 한다거나 삶 자체가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한 곳이라고 착각하게 만들만한 것들이 아님은 깨어서 알 수 있어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