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바라보는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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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나름 잉여력이 넘쳐서 세상에 관심이 참 많은 사람이구나 했는데, 지금에 와서야 불교라는 것에 슬슬 이해를 하게 되었다. 세상에 대한 관심이라는 게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아래위로 넓어지는 것이라서 또 나의 능력으로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는 범위라는 게 정말 한정적이라 이게 다 시절인연(!)에 따라 만나고 헤어지게 되는 것이로구나 또 새삼 깨닫게 된다.
내가 막연히 알고 있는 불교라는 것은 절에서 공양을 드리고 부처님을 대상으로 기복을 하는 종교였다. 하나마나한 뻔한 이야기들(인생은 고, 생로병사가 괴로움이다 등등 한자가 즐비한 수업시간에 배웠던 것들)을 진리로 이야기함으로써 어느 정도 형식을 갖춰놓고 말이다. 대개 세속 사회에서 가능성을 보지 못했거나 세속사회에서 상처를 크게 입은 사람들이 출가해서 있는 곳이 절이고 그들이 스님이 되어있는 그런 곳.
뭐랄까 자신의 힘으로 가치를 만들어내고 그것으로 먹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입장에서는 이 집단은 가치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잉여 가치를 흡수해서 기생하는 아니 잉여가치들을 과하게 빨아들여 나날이 확장하는 그런 일종의 세력으로 커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세상 어느 곳이든 이런 현상은 마찬가지라고 본다. 불교라는 테두리 안에 존재하는 수 많은 집단들 중에서도 그런 집단도 있고 아닌 집단도 있고 다양할 거라 생각은 했지만.
사람이 종교를 찾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내가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 보니 몸이 불편해지면 건강지식과 병원을 찾게 되듯 마음이 불편해지고 나면 정신건강과 종교를 찾게 되는구나 했다. 대개 어느 종교기관을 가든 부모때문에 따라온 어린 아이들, 어려서부터 종교기관에 익숙한 젊은 세대, 그리고 대부분은 나이든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나 역시 그런 사람들 중에 하나였고 그렇다고 해서 그안에서 이야기하는 진리라든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냥 그러려니 했지 그걸 의지해서 살아가야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뭐랄까 살아가는 그 자체가 나에게는 누군가의 조언이나 지혜같은 것 없이도 어려운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으니까. 그만큼 나에게 부족한 것이 없었다는 이야기도 되고 그만큼 내가 내 삶에 대해서 아쉽고 억울하거나 더 나아지거나 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는 거다.
어찌보면 대부분의 종교가 기복을 근간으로 해서 돌아가고 있다고 스스로 여기고 있었고, 자신의 문제라든가 바라는 바를 어디 가서 이야기하든 들어줄 존재는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다는 게 맞다. 내 삶의 문제는 그냥 그대로 있을 뿐이고 사람들끼리 노력하면 풀어지고 안될거면 그냥 안되버리는 것 이라고 생각했지 갈등과 괴로움 속에서도 어떻게든 살아가야되니까 그것을 위한 지혜가 필요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한 거다. 이를테면 삶에서 나에게 불편함과 힘듦만 주는 사람이 나타났다고 하면 그것을 그냥 그대로 힘들고 괴로워하며 마주하거나 되려는 분노도하고 되갚아주고 싶은 생각도 갖고 뒷담화도 하면서 그렇게 그렇게 살아가는 게 일반적이라고 생각했다. 싫지만 그냥 마주하는 것이다. 이겨내려하거나 아니면 나의 생각을 바꿔서 있는 그대로 고통없이 받아들인다는 것은 정신 차원이 나에 비해 한참 높은 사람들에게서나 가능한 일이구나 하고.
누구에게나 삶이라는 게 그렇게 평탄할 수는 없고 사람마다 삶에서 생기는 스트레스의 정도를 받아들이는 감수성이라는 게 다 각자 달라서 어떤 사람에게는 별 것 아닌 괴로움이 어떤 사람에게는 굉장히 힘든 충격이 되기도 한다. 어려운 일이라도 쉽게 잘 털어버리는 사람들이라는 게 있을까 싶지만 곁에서 보면 평생 종교나 삶의 지혜따위는 필요가 없을 정도로 괴로움가 힘듦을 잘 넘기는 사람들이 있다. 대개 이들은 종교를 갖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간다. 말 그대로 종교의 가르침이 별로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그런 사람들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들과 나의 차이점은 삶을 살아가는 세련됨에 있었다. 뭐랄까 나는 갈등의 기승전결이 상당히 투박하고 대개 상대방의 이해심으로 좋게 마무리 되었다면 그들은 그들이 갈등에 대한 컨트롤 능력이 있어서 좋게 해결해나갔다는 거다. 기본적으로 인간관게에서 아무 의미없는 욕심을 내가 많이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거다. 다시 말해서 무엇이 나에게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은지를 이미 어렸을 때 잘 깨닫고 그것을 삶에 잘 적용하며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러다 삶의 어떤 시점에서 내가 갖고 태어난 천성이 그다지 아름답지 못하고 그 때문에 가끔씩 마음의 괴로움을 겪고 그런 일이 내 삶에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음을 발견한 뒤로는 전과 달라자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다. 여기서는 사실 내가 어떤 상을 짓는 것과 그걸 바꾸고 싶다는 욕심을 가졌다는 것에서 또 다른 괴로움을 만들어내고 있다 할 수 있겠다. 어쨌든 내가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그들과 갈등관계속에서 지내게 될 확률은 내가 지금까지의 삶에서 만나온 것에 비해서 분명히 낮지만 그래도 세상을 오래 살아왔고 스스로를 단련할 수 있는 시간적인 기회는 훨씬 더 많았으니까 최소한 평균은 가자라는 생각이었던 거다. 이런 나의 욕구에 부합하는 가르침이 불교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큰 종교집단엔 나름 꽤나 오래 있어봤었지만 그 어디서도 이런 가르침은 받아본 적이 없었는데. 인간이 인간 스스로의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보다 나은 사람’이 되는 가르침을 빡시게 주는 종교가 바로 불교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 어떤 학문이나 가르침이든 문자로 씌여져있는 것을 내 안에 받아들이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것이라는 것을 잘 아는 나는 문자로 나열해도 그다지 분량이 많지도 않은 내용을 깨닫고 이해하느라 꽤나 많은 시간이 들었다. 지금도 그것들을 삶에 적용하고 응용하면서 그 간단한 것들도 막상 내가 실천하려고 보니 이렇게도 힘들 구나 하게 된다. 욕심이 많아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나란 사람의 행동과 생각의 습관이란 것의 두께가 정말 엄청나서 이것을 단시간에 깨버린다는 것이 이렇게나 어렵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는 거다.
적어도 과거의 나라면 내가 바라는 수준의 ‘나’란 것은 거의 성인의 레벨이고 어차피 성인의 레벨이라는 것은 지극히 낮은 레벨의 ‘나’따위의 사람이 도전할 수 없으니 애초에 시도도 하지 말자라는 생각을 했을 거다. 지금은 왜 그때와 다르냐고 한다면 나라는 사람이 내 생의 문제를 다루는 기술이 조금씩 늘어감에 따라 내 삶이 조금씩 편해지고 나아지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기타를 처음 시작한 사람이 손가락으로 지판 누르는 게 너무 힘들다며 불평하다가 그냥 관둬버렸던 게 나의 과거라면, 지금은 뭐라도 코드도 눌러보고 한음씩 음도 튕겨보고 하면서 그 재미를 슬슬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다. 현란한 속주와 멋진 리듬스트로크를 선보이는 고급자들를 부러워하면서 말이다. 따지고 보면 이 또한 욕심이긴 하다. 그냥 내가 나 태어난 천성 그대로 하나도 다듬지 않고 투박하게 살아간다고 해서 딱히 문제될 것은 없다. 그래도 여태까진 용케 잘 살아왔으니까. 그러나 뭔가 지금 그대로의 나로서는 앞으로 내 삶에서 마주해야 할 수많은 문제들에 더 많이 일희일비해야 하고 또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야 한다면 나의 천성의 투박함이 상대방을 불편하게 하고 또 상대방의 투박함에 내가 고통을 받을 수 밖에 없게 된다. 괴로움의 고리를 끊어내는 것은 수행자 수준의 삶이 되지 않고서야 어려운 일이겠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삶을 편안하게 살아가고자 하려는 노력인 것이다.
뭐가 되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것보단 배우고 이해하고 경험하고 실천하면서 삶의 맛을 이렇게라도 느껴보는 거다. 일평생 자신의 삶이 기쁨으로 끓어넘치는 그런 DNA를 타고 났다면 얼마나 좋겠냐만. 난 아직도 부정적이고 시니컬하다는 소릴 듣고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