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난이도 높이기...

삶의 난이도라는 게 지금과 비교가 되지 않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대부분의 골치 아픈 문제들을 부모님이 대신 해결해주셨고 내가 경험과 지식이 모잘라 무엇이 문제인지 제대로 모르고 살았다는 데 있다.

내가 고작할 수 있는 것은 어쩌다 문제집의 문제를 풀고 작성하고 싶은 프로그램이 있다면 그 기능을 어떻게 구현할지 방법을 만들어내는 정도였다. 그 외에 별다른 욕심이 없었기에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까, 어떤 친구를 내 편으로 만들어볼까 따위의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대부분 날씨가 좋으면 기분이 좋았고 비가 오면 뭔가 약간 다운되는 정도였달까. 비가 온종일 계속 내리던 시절에는 그냥 장마철이 빨리 지나갔음 하는 정도의 문제 아닌 문제가 있었을 뿐. 어차피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 나가서 놀 수 없다는 것만 빼면 별 다른 불만은 없었다.

더 생각해보면 삶의 난이도는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그것이 높다고 여기게 된 것은 분명 내가 요행수나 기적과 같은 것을 바랬기 때문일 거다. 말이 ‘기적’이지 그것은 타인의 희생을 통해서 뭔가 공짜로 얻어보려믄 못된 마음씨라고 할 수 있다. 과한 욕심이 그것이다.

유튜브로 자신들의 문제를 털어놓는 사람들을 가만히 관찰해보면 제 3자의 시점에서는 상대적으로 해결이 쉬워보이는 문제를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인 양 붙잡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더 자세히 들어보면 그들은 누가 생각해도 뻔한 해결책을 제외시키고 일부러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결과를 얻고자 하기에 해답을 찾지 못하고 그 때문에 괴로움에 빠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이것을 ‘(일부러) 인생의 난이도 높이기’라고 말하고 싶다.

일요일 밤마다 찾아오는 ‘월요일이 오지 않았으면..’하는 괴로움이 떠오른다. 그러니까 다음 날 학교/회사는 가기 싫은데 일요일의 편안함은 계속해서 누리고 싶으니까 되지도 않는 바램을 갖는 거다. 이것은 차라리 소박하고 귀엽기까지 하다. 어차피 안될 걸 알면서 바라는 것이니까.

살다가 뭔가 좋은 요행수가 용케 여러 번 일어나면 사람들이 그런 바램을 갖는 것인지, 나 역시 그런 쓸데없는 바램으로 나의 정신에너지를 허비했던 시절이 꽤 된다. 말이 요행수지 누군가가 자신이 대신 희생해서 상대방에게 이익을 가져다 준 경우라고 봐야할 것이다. 그렇게 예상하지 못했던 이득을 누리게 되면 그런 바램들이 뭔가 습관처럼 되서 누군가의 희생이 없이는 답이 나오지 않을 요구 사항을 자꾸 입력해서 답을 내라고 머리를 혹사시키면 멀쩡한 사람도 우울증이나 불안증같은 것에 시달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이곳 저곳 여행은 다 가보고 싶은데 운전하는 노력은 조금도 들이기 싫고 그렇다고 대중교통을 기다리는 시간도 들이기 싫고 돈도 안쓰면 좋겠고 싶고 그렇지만 여행 중에 늘 깨끗하고 편안한 시설에서 묵었으면 좋겠고 … 말도 안되는 목표와 바램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우린 부분 조건에 대한 해는 쉽게 찾아낼 수 있지만 모든 조건을 만족시키는 해는 죽었다 깨어나도 찾을 수가 없다. 이렇게 징징대다 보면 누군가 도와주는 상황이 본명히 그의 삶에서 여러번 발생했을 거라고 본다. 그런데 그런 상황이 한 두 번 발생하다보면 염치없게도 이런 바램에 너무 쉽게 빠지게 된다. 뭐랄까 나는 조금도 희생하거나 대가를 치루기 싫은데 누군가 대신 그 일을 해줌으로써 또 그게 여러 번 반복되서 내가 원하는 것을 아니 그 이상을 공짜로 얻어가는 기적과 같은 결과가 나오는 경우를 기대한다는 거다. 누군가 나를 위해서 매직을 부려주길 바란다는 거지.

굉장히 높은 연봉을 받고 일하면서 시장 상황이 나빠질 때에도 나는 정리 대상에서 빠졌음 하고 바란다거나 모두가 정리되는 극심한 잡마켓 환경에서 나만은 무사하길 바란다거나 등등. 모든 이익은 내가 빠짐없이 전부 다 취하고 나쁜 것은 모두 타인들의 몫이 되길 바라는 등의 생각들도 거기에 포함된다.

인생의 난이도를 낮춰주면 세상은 괴롭지 않게 살만한 곳이다. 그러니까 헛된 바램 같은 것을 갖지 않고 살면 그래도 살만하다는 거다. 안되는 걸 바라면서 왜 안되냐고 한탄하고 울고 불고 하고 타인들의 배려와 호의를 끊임없이 바라고 사는 인생 만큼 한심할 수 있을까?

누리고 싶은 게 있으면 정당한 대가를 치루고 (있지도 않을 세일이나 기대하지 않은 선물 따위를 기대하지 않고) 그동안 공짜로 누리던 혜택이 있다면 기꺼이 대가를 치루고 살면 그것 그대로의 정신적 자유로움과/여유로움이 대가로 찾아온다. 눈치 보면서 슬쩍 슬쩍 공짜로 넘어가주길, 누군가 나 대신 해주길, 누군가 나에게 호의를 베풀어주길, … 이 따위 바램들이 총합을 이루어 거대한 욕심을 내고 있다면 내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삶의 불만족과 우울이 대가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 호의가 계속 되면 그것을 마치 권리인 것으로 아는 것처럼 말이다.

인과응보라는 말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면 그것은 다 원인이 있었기에 일어나는 것이라 정당한 대가를 치뤄야 하고 원치 않은 결과가 나온다고 해도 그 누굴 탓한다는 게 의미없다는 뜻이다. 생각보다 이것을 너무 쉽게 잊고 어떻게든 피하려고 하면서 타인의 배려/호의 또는 요행수나 바라면서 살면 삶의 난이도가 극상으로 올라갈 수 밖에 없다. 미천한 인간이 스스로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겠다고 맘먹은 것이니까. 뿌린만큼 거두게 되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