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심..

“변심”이라는 말은 단어의 형태나 발음만으로도 어딘가 부정적인 느낌을 준다. 대개는 믿었던 누군가가 예상 밖의 행동을 보였을 때, 그러니까 의지했던 연인이 떠나버리는 경우에 자주 쓰인다.

내게 변심은 곧 배신 같은 느낌을 준다. 변심한 자는 대개 신뢰할 수 없고, 상대의 믿음을 철저히 무너뜨리는 ‘나쁜’ 존재처럼 여겨진다.

비슷한 뜻이라도 한자를 바꾸면 인상이 달라진다. 이를테면 “이심(移心)”, 마음이 이동했다든가, “회심(回心)”, 마음이 돌아왔다는 표현은 “변심”보다는 훨씬 부드럽고 긍정적인 울림을 가진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변심’을 다른 단어로 대체할 수는 없다. 단어는 뜻만이 아니라 주로 쓰이는 맥락과 뉘앙스가 함께 굳어 있기 때문이다. 이건 한국어뿐 아니라 대부분의 언어가 그렇다.

마치 레고 블록처럼 겉보기에 모양이 같다고 해서 색이 다른 블록들을 무작정 끼워 맞추면, 결국 형태가 어색해지는 것과 비슷하다.

“사람이 변심”했다는 말에는 어쩐지 변덕스럽고, 줏대 없고, 가벼운 성정이라는 평가가 따라붙는다. 단어가 가져다주는 부정적인 의미는 마치 ‘악한 마음이 누군가를 꼬득여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했다’처럼 해석되니까.

하지만 사실, 변심은 꽤 많은 에너지를 요구하는 일이다.

마음이 바뀌면 관계가 바뀌고, 행동이 달라지고,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많은 변화와 에너지 소모가 따라온다. 그래서 가능한 한 변심하지 않고 머무는 쪽이 더 이로울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변했다는 것은, 변화를 하고자 마음 먹었다는 것은 이 존재가 궁극적으로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나름의 단호한 결단을 내렸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때의 변심은 갑작스러운 변덕이 아니라, 작은 불편함과 균열이 축적되어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임계점에 다다르는 과정에 가깝다. 이건 ‘그만큼 힘들었다’는 뜻이고, ‘도저히 더는 유지할 수 없었다’는 외침이기도 하다.

믿었던 누군가의 시점으로는 ‘변심’은 부정적일 수 밖에 없겠지만 ‘변심’의 주체의 시각에서는 세상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적응하려는, 세상과 함께 생존하기 위한 나름 큰 결단인 것이다.

특히나 나처럼 에너지를 보수적으로 사용하는 입장에선.

마음속에서 이미 여러 번 큰 결정이 내려졌음에도 변화가 귀찮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 나는 내 마음에서 울려오는 그 모든 신호를 무시하고 있다가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튀어나온 나의 “돌발적” 행동에 놀란 적이 꽤 있다. 하지만 그건 돌발이라기보다는, 깊이 뿌리내린 마음의 흐름이 수면 위로 떠오른 순간이었다.

‘나의 의식’과 ‘나’는 하나의 단일한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서로가 서로를 제대로 알고 이해하지 못 하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건이었기도 하다.

이런 경우를 단순한 변덕에서 비롯된 결과라 할 수 있을까?

멀리서 보면 세상의 변화는 갑작스럽기도 하고 무작위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그 안엔 명확한 원인과 흐름이 있다. 겉보기에는 랜덤하지만, 모든 ‘일어남’은 나름의 원인들에 의한 결과인 것이다.

우리는 감사한 일보다 부정적인 일을 더 오래 기억하고, 그 원인을 분석한답시고 되새김질을 하며 스스로의 기억에 더 깊이 새겨넣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별것 아닌 일에도 부정적인 의미를 덧입히고 있는 자신을 문득 바라보게 된다. 늘 그런 나의 모습이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세상 모든 것이 그러하듯 부정적인 의미를 추구하는 나에게도 이젠 충분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 한다.

그 모든 것들은 이후에 일어날 또 다른 변화를 이끈다.

변화하려는 것 자체에도 에너지가 들지만, 변화에서 나오는 에너지도 있다.

당장 청소할 기운도 없던 사람이 이사를 앞두고는 놀라울 정도로 분주해지는 것처럼. 그 변화가 정착되기까지 스스로 질서를 찾아가려는 에너지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뒤따른다.

그래서일까? 한참동안 변화가 없으면 따분하고, 그러다가 또 막상 어떤 변화가 올까봐 두려워지기도 하고, 또 그렇게 다가올 변화를 겪기 싫어 이리 저리 피해다니다고 하다가, 마침내 변화가 일어나면 또 놀라울 만큼 능동적인 모습이 된다.

이것이야 말로 생존을 위해 위기상황을 극복하고자 나 스스로가 불어넣은 에너지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의식 속에서 수 많은 굳은 다짐을 백번이고 천번이고 해도 움직이지 않던 내가 변화의 상황에 직면하면 직관적으로 그것이 나의 생존과 연관이 있다 판단되면 생각보다 행동이 먼저 나서게 되듯.

나는 이래서 뭔가 뿌옇게 흐린 하늘을 바라볼 때의 느낌 만큼이나 에너지가 없고 추욱 늘어진 듯한 생기 없는 나를 보면 다시 생존의 위기상황으로 날 몰아가야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치 ‘뽕맞은 마린’처럼 나에게 에피네프린을 주입할 수는 없으니 ‘변심’이라는 기재를 통해서 스스로의 생존 본능을 깨워내려하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