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의 변화...

내가 실물의 ‘가치’를 가격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건, 아마도 어린 시절 물건 값에 눈을 뜨기 시작했을 때였던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직장을 다니고 돈을 벌며 결혼을 하고, 치솟는 집값을 바라보며 대출을 받고 집을 사게 되면서, 실물 가치에 대한 감각은 점점 희미해졌다. 대부분의 시간을 회사에서 보내고, 절약하며 정신없이 살아가는 와중에 언제부턴가 물건의 ‘값’을 판단하는 기준 자체가 흐려져 버린 것이다.

요즘처럼 주식시장과 자산 시장이 미친 듯이 오르는 시기엔,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상대적으로 빈곤해지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막상 현금을 투자하자니 이미 너무 올라버린 시장이 끝물 아닌가 걱정되고, 큰 조정이 올까봐 두려워 쉽게 움직이지도 못한다. 그렇게 머뭇거리다 보면 결국 “나는 얼마나 뒤처지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에 조용히 물가를 계산해보게 된다. 내가 실물의 ‘가격’을 인식하기 시작했던 시점 이후로 물가는 과연 얼마나 올랐을까?

대략 10년마다 2배씩 오른다고 치면, 30년 동안은 약 8배. 집값, 특히 서울이나 미국 일부 도시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이 올랐다. AVGO나 NVDA 같은 종목은 최근 5년만 해도 10배 넘게 올랐고, 금값도 마찬가지다. 팬데믹 시절 풀린 천문학적인 유동성을 보면 자산 가격이 단순히 ‘부풀려졌다’기보다 기준점 자체가 이동한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그 돈은 회수될 기미조차 없고, 오히려 더 풀려나가고 있다.

30년간 8배 상승을 기준으로 보면, 어떤 것들은 아직도 말도 안 되게 싸고, 어떤 것들은 터무니없이 비싸다. 마치 성장주와 가치주의 괴리처럼, 실물 가치 안에서도 그런 차이가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한국에서의 실질임금은 30년 전과 비교해도 오히려 줄어든 것처럼 느껴진다. 집값은 물가보다 훨씬 더 가파르게 올랐지만, 소득은 그렇지 못했다. 그러니 살기 어려운 것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유지되고 있는 것은, ‘의식주’ 중 ‘의’와 ‘식’의 물가가 상대적으로 덜 올랐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특히 식품과 생필품은 생산성 향상 덕분에 가격 상승이 억제된 분야다. 이 덕분에 일반 시민들은 생존 자체에 대한 박탈감은 덜 느끼고 살 수 있었던 것 같다.

예전 한국의 옷값을 떠올려보면, 지금은 상대적으로 옷에 대한 사회적 압력이 약해졌다는 느낌도 든다. 하지만 여전히 여름방학에 한국에 가는 사람들이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옷을 사러 간다”는 말을 하는 걸 보면, 주변을 의식하고 눈치를 보는 문화는 여전하다는 생각도 든다.

미국에 처음 왔을 땐, 이렇게 물질이 풍요로운 나라에서 왜 다들 별로 좋은 옷을 입지 않을까 궁금했다. 하지만 오래 살아보니 알겠다. ‘비싸고 좋은 옷’이 아니면 특별한 차이를 느끼기 어렵고,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냥 편하게 입기 때문이다. 또한 다양한 인종과 외모 스펙트럼 속에선, 옷 하나로 ‘달라 보이는 효과’를 기대하기도 어렵다. 결국 나도 어느새 여기에 동화되어, 가능한 싸고 적당한 옷을 골라입게 되었고 서울에서 살 때처럼 ‘잘 차려입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게 되었다.

어쩌다 서울에 가서 친구들을 만나더라도, 나는 그냥 편하게 입는다. 요즘 유행하는 메이커 옷을 입지 않는다고 해서 스스로 초라하게 느끼지도 않고, 그걸 신경쓰는 것 자체가 이제는 귀찮고 무의미하게 느껴질 뿐이다. 사실 이곳에서 입는 옷값은 1990년대 한국 유행 브랜드와 비교하면, 지금도 엄청나게 싸다고 느껴질 정도다.

가끔은 좋은 옷을 입고 나간 날, “내가 왜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쓸데없이 잘 차려입었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오랜만에 서울에 가서 친구를 만나서 내가 내겠다고 하기 전에 자기들이 사겠다고 한다. 얼마나 남루하면 다들 나만 보면 사주겠다고 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재빨리 움직여서 계산하지 않으면 돌아올 때쯤 되서 굉장히 미안한 느낌을 갖게 된다.

뭐랄까 한국에서는 너도 나도 음식점을 차려서 서로 경쟁하기 때문인지 외식하는 비용도 그동안의 물가 상승폭에 비하면 생각보다 낮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동안 나빠진 환율을 생각하면 더 그렇다. 어쨌든 나를 보고 측은지심이 발동하여 그런 것이라면 어쩔 수 없다고 본다만.

본론으로 돌아와서,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신발을 신고 좋은 음식을 먹는 건 그렇지 못한 것보다는 나을 수 있다. 하지만 비싸고 잘 알려진 브랜드가, 반드시 내 몸에 잘 맞고 나에게 또 내 건강에 좋은 것만은 아니다. 대충 입고 대충 먹더라도, 내 몸에 편하고 내 기준에 맞는 게 중요하다.

결국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는 그들의 문제일 뿐이고, 나는 나대로 편하고 자유롭게 사는 것이야말로 나를 위한 삶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