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럼프...

한여름이라고 부를만한 시기가 시작된 지도 꽤 되었는데, 그동안의 기록들을 돌아보면 이 시간 동안 의미 있는 성장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한마디로, 슬럼프가 계속되고 있다.

흐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매일 무엇을 했는지 작게나마 적어왔지만, 대부분은 ‘하려고 한다’ 혹은 ‘착수했다’는 말뿐, 실질적인 결과는 거의 없다. 이런 상태라면 차라리 휴가라도 가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내가 떠올리는 ‘휴가’의 목적은 단순히 쉬기 위해서라기보다, 의도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에게 일종의 채무감을 부여하고, 돌아왔을 때 그것을 연료 삼아 다시 추진력을 얻으려는 게 아닐까 싶다. 문제는, 하려는 마음만 가득하고 실제로 손에 잡히는 게 없다 보니, 그냥 자리에 앉아 있는 것조차 이제는 아무런 동력도 남아있지 않다는 느낌이다. 만사가 귀찮고, 뭔가 손을 대는 순간 해야 할 일들이 쏟아져 나올 것 같다는 두려움까지 생긴다.

결국 ‘해야만 한다’는 압박이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드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 와중에도 나는 나 자신을 관찰하고 있지만, 뚜렷한 성과 없이 한참 동안 스스로의 답답한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안타까운 마음을 자아낸다. 이런 시기엔 스스로를 다그치거나 채근해봤자 별 의미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오늘 오전에는 혈액검사를 받으러 근처 LabCorp에 다녀왔다. 잠시 배경을 설명하자면, 한국이라면 동네 walk-in 클리닉 어디서든 손쉽게 검사받고 다음 날 결과를 받을 수 있지만, 이곳에선 개인 병원이 직접 채혈하거나 분석하지 않는다. 대개 검사를 전문으로 하는 곳에 따로 의뢰해야 하고, 보험이 없다면 꽤 큰 금액을 지불해야 한다. 그래서 미리 예약을 잡고, 의사의 검사 의뢰서(order)를 챙겨 가는 번거로운 절차가 필요하다. 어차피 검사처방을 하는 의사가 온라인으로 입력하면 사실 이래야 할 이유가 없는데 왜 이렇게 번거로운가 해봐야 별 의미가 없다. 예전부터 쭈욱 그냥 이런 식으로 돌아가고 있는 시스템이다.

그래도 1년에 한 번, 보험에서 기본으로 커버하는 정기 검진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방문한 것이지만, 막상 가보면 동네에 이런 사람들이 살고 있었구나를 다시 알게 될 만큼 다양한 이들을 마주하게 된다. 그들의 배경이나 이유를 굳이 파고들 필요는 없지만, 문득 저마다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체크인을 마치고 앉아 있으니, 전문성 있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자리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며 무언가를 분주히 처리하고 있다. 정작 검사를 받으러 온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데도 내부는 꽤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다 내 이름과 비슷한 이름이 불려 나가 확인해보니, 내가 멍청하게도 검사 의뢰서를 안 가져온 걸 깨달았다. 처음엔 예약을 취소하고 다시 와야 하나 물어봤는데, 다행히도 조금 전까지 전문성 없어 보인다고 생각했던 직원 한 명이 유연하게 대처해 주어 헛걸음을 면할 수 있었다.

그 순간, 나란 사람의 수준이 얼마나 우습고도 한심하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마음 같아선 시원한 음료라도 한 박스 사서 돌리고 싶었지만, 그냥 시간과 수고를 아껴줘서 고맙다고 몇 번 인사하는 것으로 마음을 전하고 나왔다.

그 일을 계기로 나는 또 한 번 깨달았다. 이곳에서 10년이 넘는 시간을 살아오면서, 나는 점점 타인을 쉽게 신뢰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게 되었고, 그만큼 고립되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세상이 내가 생각하던 것처럼 무능하거나 무책임하거나 타인을 이용하는 이기적인 사람들로 가득 찬 곳이 아님에도, 나는 언제부터인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나 이외의 사람들과의 접촉을 최대한 피해가며 모든 것을 내 힘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믿으며 스스로 고립을 선택해온 삶을 살고 있었다는 걸.

뜻한 바는 아니었지만, 마침 오늘 우연히 집어 든 책에서는 세상에 대한 불신으로 인해 공교육조차 신뢰하지 못하고, 백신 접종도 거부한 채, 신의 뜻만을 붙잡고 고립된 지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려지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반나절 사이 두 번이나, 머릿속 어딘가에서 울리는 종소리를 듣는 듯한 깨달음을 경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