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에 저항하지 않기...

심심해서 몇 년 전에 썼던 글들을 다시 읽어보았다. 대부분 즉흥적인 감정의 스냅샷들이다. 이름도 얼굴도 없는 블로그에, 누구 하나 읽지 않을 걸 알면서도 꾸준히 기록해 온 것들이라 돌이켜보면 참 기특하다 싶다.

내용은 대개 비슷하다. 내 삶이 마땅찮고, 나라는 인간도 영 마뜩잖고, 답은 없으니 답답하다는 하소연들. 가끔 흥미로운 일이 생기면 그걸 써놓기도 했지만 사실은 해야 할 일이 있는데 하기 싫어서, 뭐라도 하고 있는 척이라도 하려고 글을 쓴 경우가 많다. 시간이 남아도는 것도, 그렇다고 여유로운 것도 아니면서.

이런 나의 반복적인 감정 패턴을 불교에서는 ‘윤회’라 부른다고 했다. ‘이번엔 다르게 해보자’ 다짐해도, 막상 똑같은 상황이 오면 예전처럼 화를 내고, 실망하고, 되풀이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답답한 감정은 불안과 분노다. 대범함의 정반대에 있는 감정들.

“이런 일은 세상 누구나 한 번쯤은 겪는 일이다.” 라고 넘기려고 해도, 왠지 나한테만 유난히 안 좋은 일이 집중되는 것 같고, 그래서 억울하고 화가 나고, 결국엔 나만 망할 것 같은 불안감에 사로잡힌다.

그러면서도 마냥 받아들이기만 하는 건 스스로를 방치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내 삶인데, 그 주인이 나인데 왜 이렇게 무력하게 내버려두는 건지.


되돌아보면, 내 삶을 대신 결정해주거나 책임져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지만 나는 예전엔 미래를 딱히 생각해본 적도 없고, 그래서 불안해한 적도 없었다. 삶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크게 분노한 적도 없었다. 다만, 내 인내심을 시험했던 몇몇 사람들에 대해서는 강하게 분노한 적이 있었을 뿐이다.

아마 그때는 그냥 지금을 열심히 살면, 미래도 별일 없이 흘러갈 거라는 막연한 믿음 같은 게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지금은, 단지 오늘을 열심히 사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이 있어야만, 겨우 남들의 평균에 따라갈 수 있을 것만 같다.

“오늘을 진심으로 살면 걱정 없는 내일이 온다”는 말은 결국 순진한 아이의 믿음이었을지도 모른다.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이제는 너무 많이 보아왔다. 그래서 불안도, 분노도 더 짙어졌다.

특히나, 그저 땅을 잘 사두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대대로 부유해지고, 적당히 눈치 보며 기회를 잘 포착하기만 하면 마치 인생의 치트키라도 쓴 듯이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지나치게 많이 봐왔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 옛날 ‘강남 아파트’ 같은 선택을 하지 않으면, 죽도록 노력해도 거지가 될 것 같은 두려움. 그런 생각이 자꾸만 드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나란 사람이 내 삶을 끌어가는 것이 맞긴 한 것일까? 아니면 세상의 흐름에 의해 단순히 이리 저리 왔다갔다 하는 것일 뿐인데도 내가 마치 내 삶을 끌고가는 것처럼 느끼고 있는 것일 뿐일까? 가만히 바라보면 나는 엄마가 차려준 밥상을 꼬박 꼬박 받아 먹으면서 늘 반찬투정을 하다가 이제 겨우 고마움을 느낄랑 말랑하는 수준에 온 게 아닐까?

그냥 세상의 흐름에 휘둘려 살면서 고작해야 이거 먹을까 저거 먹을까 선택이나 겨우겨우 하면서 이게 좋네 나쁘네 불평이나 하고 살고 있으면서 마치 내가 주도적으로 내 인생을 결정해온 것이라 착각하면서 살아온 것 아닐까 하는 거다. 어차피 이걸 고르나 저걸 고르나 세상 흐름의 물결을 내가 크게 거슬러 살아갈 수 없는데도 나는 다만 내가 선택해서 만들어온 삶을 살고있다고 착각하는 것 아닐까 하는 거다.

나도 뭐가 맞는지 그른지는 알 수 없지만, 대저 그런 맥락이라면 내 앞에 놓이는 선택들에 너무 연연하지 말고 세상 흐름의 변화라는 것에도 너무 맘 쏟지 말고 그냥 그 흐름을 즐길 수 있다면 그래서 주어진 시간이 다하면 쉽게 털고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

바닷물에 들어가서 그 흐름에 내 몸을 맡겨서 둥둥둥 떠다니며 주어진 시간동안 즐겁게 놀다나올 생각을 하기보단, 특별히 좋고 나쁠 것도 없는 바닷물 한 가운데에서 스스로 이 방향으로 가야만한다 저 방향으로 가야만한다 혼자 심각해져서는 물살을 거슬러 보려고 있는 힘을 다해가며 진땀을 빼고 있다면 누가봐도 한심해보이는 것 아니냔 말이다.


오늘 오전에 누군가 한 말이 기억이 난다. 정체성이라는 것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맞춰 정해지는 것이지, 그것과 상관없이 나는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라는 마음을 가지면 힘들어질 수 밖에 없다고. (마음이) 힘들다는 말은 쉽게 말해 답이 없는 지경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집착에 휘둘리다보니 답이 없는 문제에서 답을 내게 하려 하다보니 내 인생을 고통속에 휘말리게 된다.

살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뭐랄까 내가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류의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와 내가 동일한 시점에 비슷한 환경에 놓여있었을 때, 나는 ‘어떻게든 이곳이 싫으니 벗어나야 한다’라는 생각에 빠져 매일 매일 괴로운 하루를 보냈던 반면, 그 친구는 주어진 상황을 즐기며 살았다. 소위 ‘너는 꿈도 없냐?’ 혹은 ‘너는 이곳이 그렇게 좋냐?’ 싶을 정도로. 속 마음이야 어쨌든 매일 매일 즐겁게 살았다. 살아가는 것에 그다지 힘이 들지 않으니 사람들에게 늘 친절하고 상냥했다.

쉽게 말해 나는 매일 매일 주어진 상황을 이겨내겠다는 일념으로 10의 힘을 주고 살았다면, 그 친구는 현재에 순응하며 1만큼의 힘을 쓰고 나머지 9를 남들과 재미있게 보내는 데 썼다. 그렇게 1년이 가고 2년이 가고, 10년이 가고 20년이 가도 그 친구는 그렇게 여유롭게 지내온 반면, 나는 지금도 뭔가 벅차다. 그동안 들여온 수고와 고통으로 보면 그 친구와 내는 엄청나게 다른 길을 가고 있어야 맞을 것 같지만 별로 그럴 것도 없다.

이것은 타자와의 경쟁이 아닌 나 자신이 가진 의미 없는 집착 내려놓기인 거다. 현재를 살아가는 그 마음자세와 태도다. 나의 어리석은 집착은, 처절한 오늘이 있어야 더 나은 내일이 있을 거라는 한심함에 가깝다. 별반 다르지 않은 삶을 살면서도 나는 굳은 얼굴로 타자와 경쟁한다는 맘으로 살아왔고, 그는 편안하고 여유있는 모습으로 타자와 함께하는 삶을 살았다.


그냥 세상 흐름에 따라 나는 그런 선택을 해야 할 기로에 놓였고 나는 내 성향 그대로의 선택을 했고 그 선택의 궤적이 내 인생일 뿐이다. 특별히 강렬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도 그저 내 성향이 발현되었을 뿐, 내가 그렇게 힘주어 살지 않았어도 가게될 길이었고 힘주지 않았다면 여유롭게 갈 수 있는 길이었다.

나의 삶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면 같은 길이라도 여유롭고 힘을 남겨서 갈 수 있다. 그러한 삶이 있게끔 스스로 능동적으로 개척했더라도 지금의 결과를 겸허하게 받아들일텐데, 되려 수동적으로 선택에 기로에 놓여버렸던 삶만을 살아왔음에도 이러쿵 저러쿵 불평한다면 뭔가 스스로 수치심을 느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