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새 랩탑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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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생활을 오래하다 보니 회사에서 받은 랩탑이 도대체 몇 대였는지 셀 수도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일부러 데스크탑을 지급받던 시절도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거의 대부분이 랩탑을 지급받는 것으로 안다.
회사에서 받는 물건들은 기본적으로 일반 사무직을 위한 것들이라 기능이 제한돼 있고, 거기에 회사 보안 소프트웨어까지 얹히면 사실상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던 기억이 있다. 다행히도 개발 일을 했던 터라, 개인적으로 별도 구입한 성능 좋은 시스템들을 이것저것 많이 굴려볼 수는 있었다.
이번에 받은 랩탑도 맥북프로인데, 지난번 지급받았던 16인치의 엄청난 무게에 질려서 이번엔 14인치로 신청해서 받았다. 확실히 훨씬 가볍고 좋다. 지난번에는 여러 가지로 사양이 워낙 훌륭해서 일부러 16인치를 선택했던 것 같긴 하다만.
음…
막상 받아보니 이 머신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메일 받고 답장하고, 온라인 미팅 들어가고, 오피스로 문서 열어서 조금 수정하고, 회사 인트라넷에서 이것저것 결재하고 체크박스 체크해주는 정도? 그 이상은 사실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솔직히 말해서, 정말 아무 일도 못 하게 되어 있다. 이 이상은 뭘하든 관리자의 허락을 받도록 되어있는데 귀찮게 허락받아서 이것 저것 하느라 시간을 버리기 보단 회사 장비로는 안되서 못한다고 하는 게 정신 건강상 낫다.
지난번에 받았던 물건은 그래도 지급받은 장비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틈새’가 제법 있었어서 결국 내 개인 장비처럼 쓸 수 있었는데, 이번 물건은 애초부터 그런 게 불가능한 구조다. 어찌보면 세상 물정 모르고 새 장비를 덜컥 신청해서 받아버리는 바람에, 즐겁게 잘 쓰던 옛 친구를 강제로 떠나보내게 생긴 셈이다.
그래도 이 역시 내가 선택해서 벌어진 상황이니 어쩔 수 없다. 예전 장비가 좋으니 그걸 계속 쓰겠다고 하고 새것을 반납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로써 집안에 난립하던 여러 대의 맥들이 전부 내 개인 장비로 수렴되고, 회사 장비로는 회사 일만 하게 됨으로써 사실상의 워라벨을 유지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 셈이다.
같은 머신으로 회사 일과 내 일을 함께 하다 보니, 이 둘이 제대로 분리가 되질 않아서 내가 내 삶을 살고 있는 건지, 회사 종업원으로서의 삶만 살고 있는 건지 구분이 흐려졌는데, 이렇게 강제로라도 구분이 되니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참에 멀쩡한 내 개인 장비에 깔려 있던 여러 가지 회사 일 처리용 설정과 소프트웨어들도 한꺼번에 다 삭제할 때가 된 것 같다. 이제 일처리가 늦어져도 “회사에서 준 장비로 할 수 없는 일이다” 라고 하면 되는 거고, 번거로운 일을 도와달라고 해도 “회사 장비로는 못하는 일이다” 하면 되는 거다. 이로서 빠르고 깔끔하게 일처리를 잘해주는 짓도 이제는 이것으로 안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