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E...

아주 어렸을 때 내가 부모님께 내 꿈이 ….가 되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던 또렷한 기억이 있다.

여러 번도 아니고 딱 한번 말했던 것 같은데, 신기하게도 난 그 길을 지금도 가고 있다.

그 나이대 아이들의 꿈이란 게 의사, 법관 등등의 것이었음에도 나의 미래 희망이 상당히 구체적이었다는 사실이 재미있는데, 물론 아쉽게도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길이 그 구체적인 대상에 완벽하게 부합하진 않지만 대체적으로는 부합한다. 어떤 면으로는 생각보다 더 나갔고 어떤 면으로는 모자르기도 하다. 사람이 하는 일이 그렇지.

내가 EE(Electric engineering)세계에서 한번도 곁눈 질 해 본 적도 없고 지금까지도 머물고 있다는 사실은 한땐 ‘나는 참 하나밖에 모르는 고지식한 인간이구나’란 자괴감에 빠지게 했지만 또 그 누구에도 이런 내가 자랑스럽다 말하진 않지만 지금까지 내 마음속의 자랑으로 남아있다. 다른 것들은 다 몰라도 그냥 귀한 나의 보물이랄까.

세상이 참으로 제행무상이라고 느끼는 것이 지금의 반도체 붐, 신경망 이론이 사실상 EE 기술의 총아가 되어버린 생황이라고나 할까. 그럼에도 다른 분야에서 어찌 저찌 생존해 오던 내가 여태 EE 세계에서 벗어나지 않고 남아있다는 것이 정말 신기할 노릇이지만.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게 될지는 모르지만 내 커리어의 끝까지 EE 세계에 머물고 싶다. 아무도 머물러 달라고 하지도 또 더 머물러야 할 이유는 없지만. 그냥 그렇게 있고 싶은 거다.

‘존재한다’라는 것이 바로 이런 걸 의미하는 것 아닐까?

아무도 내가 세상에 살아달라고 또 머물러달라고 하진 않지만 이 세상의 공간을 점유하고 버티고 있는 것. 나 스스로 느끼기에 이 세상에 딱 하나 뿐인 적임자라고 생각되진 않지만 그래도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버티는 것.

사실 이 관점은 예전의 내가 갖던 것과 전혀 다른 관점이다.

이를테면 예전엔 누군가 탐낼만한 좋은 자리에 있으면 ‘도대체 저 자리에 있으려면 어느 정도의 역량이 되어야할까’를 부러워했다면, 지금은 ‘저 자리에 앉아있을 만한 자격이 되서 버티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매의 눈으로 쳐다보면 그럴만한 자격이 있어서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냥 살다보니 그렇게 되어버린 것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