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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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엔 운명이라고 하면 특수한 개인이 맞이하게 되는 인생의 상황, 맞이할 수밖에 없는 흐름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오래 살다 보니, 운명이란 것은 결국 내가 처한 조건에서 흔히 일어날 법한 일들 중 하나일 뿐이라는 걸 알게 됐다. 같은 조건에서 나올 수 있는 흐름과 귀결이 애초에 그다지 다양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마치 이미 결정된 것, 그렇게밖에 갈 수 없는 것처럼 해석되는 것이다.
흔히 “운명 따위는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들이 부정하는 것은 특정 개인에게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특수한 삶의 흐름이 있다는 주장일 뿐, 특정 조건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대체로 가게 되는 삶의 경로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운명을 점친다는 이들은 다양한 사람들의 삶의 조건을 패턴학습한 뒤, 유사한 조건을 가진 사람이 앞으로 어떤 패턴의 삶을 살게 될지 추론하는 일을 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엔 방문자가 전달하는 다양한 정보가 이미 재료로 들어가 있으니, 그것을 잘 캐치하거나 운 좋게 맞아떨어지는 일이 많으면 용한 점쟁이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생각보다 사람들은 굉장히 다양한 패턴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건 사람의 수가 워낙 많고 각자에게 주어진 조건의 조합이 다양할 뿐, 각각의 조건에 대한 개개인의 반응이란 건 의외로 뻔하다. 그래서 그 조건들을 조합해보면 한 사람의 과거, 현재, 미래를 어느 정도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나의 삶의 모습도 그만큼 뻔하다는 것이다.
나에게 주어진 조건은 내가 가장 잘 안다. 들여다볼 대상이 ‘나’라 해도, 나를 타인이라 생각하고 바라보면 지금까지 살아온 궤적도, 앞으로 그려갈 궤적도 어느 정도 그려보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만 그게 쉽지 않은 이유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스스로 내 앞날을 규정짓는 게 싫어서 하지 않는 것뿐이다.
그러니까 문제는 사실 쉬운데, 그대로 답을 쓰기가 싫은 거다. 혹은 그 답이 아니었으면 하니까, 다른 답을 쓰고 싶은 거다. 그런데 그건 애초에 그 문제의 답이 아니니 답답하고 힘들어진다. 10년 전의 나에게, 20년 전의 나에게 지금 나의 삶의 조건을 가져다주고 “이 사람의 삶은 어떻게 흘러갈 것 같으냐”고 물으면, 그게 나인 줄 모르니 오히려 잘 대답해줄 거라 생각한다. 내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그 답이 그만큼이나 너무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나 자신에게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나는 뭔가 다를 것 같으니까. 나는 뭔가 특별할 것 같으니까. 나는 그 흔해빠진 사람들의 모습과는 다를 것 같으니까. 나 역시 타인들의 눈으로 보면 지극히 뻔한 사람 중 하나다. 하는 행동이나 삶의 궤적도 그냥 너무나 deterministic하다라고 할 수 있을만큼 그러하다. 다만 그저 나만의 삶의 고유한 사건들이 있었을 뿐인데, 이것은 평균은 대동소이 하지만 적정 수준의 노이즈가 끼어있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거다.
그래서 결국 다른 사람을 찾아가 뻔한 얘기를 해달라고 하는 것이다. 누가 하든 뻔한 이야기인데, 남의 입을 통해 들어야 비로소 “그런가?” 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운좋게 노이즈스러운 나의 인생 사건 하나 (말이 노이즈지 세대와 삶의 흐름이 유사하면 공통적으로 벌어지는 사건)를 잘 맞췄다면 이 사람의 말에는 신뢰와 권위가 생긴다.
사람을 관찰하기 좋아하고 타인의 의도와 행동을 잘 분석하는 사람이라면, 소위 자신의 운명 — 지금 주어진 조건으로 봤을 때 어떤 패턴의 삶을 살게 될 것인가 — 은 오히려 더 쉽게 알 수 있는 것 아닐까. 굳이 명리학 같은 걸 공부하지 않아도 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신내림을 받았다거나 산에 들어가 수련을 했다거나 하는 이력이 있어야만 권위 있고 더 정확할 거라 생각하는 모양이다. 사람의 인생을 공부하고자 하는데, 보편적인 사람들과 동떨어진 곳에 가서 수련을 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됨에도 불구하고.
또 사람의 인생이 예나 지금이나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다고 하더라도, 최근 사람들의 삶을 직접 겪고 듣고 보아온 내가 그것을 판단하는 게 나을까, 아니면 옛날 사람들의 삶을 기록한 옛 문헌을 공부했다는 이의 생각이 더 나을까 — 이건 생각해볼 문제다.
초라한 옷차림에 근심 가득한 얼굴로 점집을 찾아가는 것과, 근사한 옷과 럭셔리 아이템으로 무장하고 밝은 얼굴로 찾아가는 것. 이 두 경우 모두 똑같은 이야기를 듣고 돌아올 거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서로 다른 맥락을 입력했으니 다른 출력이 나오는 게 당연하다. 게다가 애초에 누군가를 찾아갔다는 사실 자체가, 스스로를 관찰하지 못하고 타인의 말에 쉽게 흔들리는 사람이라는 정보를 이미 제공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나’라는 사람의 근본적인 정체성이란 것도, 사실 연령대나 성별 정도의 수준에 불과할지 모른다. 오히려 지금 당장 내가 어떤 모습으로, 어떤 조건 속에서 살고 있는가가 나의 현재와 미래를 훨씬 더 크게 좌우한다.
결국 운명이란 신비한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서 있는 조건의 산물이다. 그걸 알면서도 남에게 가서 확인받고 싶어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원인을 제공한 것이 나이지만 결과는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라는 것일 수도 있고. 뻔한 말도 뭔가 권위가 있어 보이는 이에게 들어야 받아들일 수 있다라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