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끊기 힘든 습관의 집합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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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며 겪는 여러 가지 일들, 그리고 내 자신의 반응들을 보면 ‘나’라는 것은 습관의 집합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소위 ‘나’를 바꾼다고 하는 것은 그 습관 - 자극과 그에 대한 반응이 일정하니까 그것을 회로라고 하는 것 같다 - 의 어떤 것을 깨거나 다른 것으로 바꿔주는 일이고. 또 다들 알다시피 그 습관을 바꾸는 데에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것도 잘 안다.
통증회로 처럼 어떤 자극이 주어지면 무조건 그것을 통증으로 받아들이기도 하고, 중독현상 처럼 어떤 자극에는 쾌감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소위 사람이란 것은 어떤 자극에 대한 통증/쾌감 반응으로 놀아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를테면 100가지의 자극에 대해서 반응하는 정도를 DB처럼 만들어놓으면 그 사람의 특징을 전부 정의했다고 할 수 있는 것 처럼 말이다. 신기하게 이 사람이란 시스템의 반응은 시간에 따라 변화하기도 하고 더러는 속기도 한다.
세상은 나에게 어떤 자극을 주기 위해 바뀌지 않고, 또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바뀌지도 않는데, 사람은 그저 스스로 가지고 있는 감각기관을 통해서 제맘대로 해석해서 기쁘고 슬프고 … 할 뿐이고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되기 바라고 그렇지 않아서 우울해하기만 하는 것이다. 그러니 어리석다는 말도 듣는다. 사람이 사람에게 스스로 어리석다고 한다. 그래서 덜 어리석으려면 그냥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하는 것이고,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태어난 또 태어난 이후에 스스로 만들어놓은 우리의 틀에 맞추어 바라 볼 수 밖에 없으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래서 누군가는 몹시 즐겁고 행복한 감정을 누리고 살기도 하고 어느 누군가는 늘상 힘들고 괴롭기만하다. 또 누군가는 힘들고 괴롭다는 사람의 그 세상을 바라보는 회로를 통증회로에서 쾌감회로로 고쳐주는 것을 업으로 하며산다. 어떤 누군가를 바라보거나 어떤 일을 할 때 고통을 받는 회로를 어떻게든 습관을 들여서 그것에 쾌감을 느끼도록 습관을 들이게 하는 것이다.
마치 처음엔 별로로 보였던 사람이 자꾸 만나다보면 친숙해보이고 잘생겨보이고 좋아보여서 마침내는 평생을 같이 살게 되는 것처럼.
그런 의미로 따져보면 누군가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 단 한번에 끊을 수 없는 끌림을 만들어낸다는 게 말이 잘 안되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하는 것을 보면 그것은 그 대상과 전생에 인연이 있었기 때문 - 즉, 전생에 오래도록 보고 지낸 사이라는 - 이라는데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시간이 가면 갈 수록 느끼게 되는 것은, 왜 사람은 어떤 것에 중독도고 집착하게 되는 것이냐 하는 것이다. 돈에 집착하고 수많은 것들에 중독되고 그것을 끊지 못해 괴로워하고 하는 것일까 하는 것이다. 사랑을 주진 않아도 받고 싶고, 누군가에게 의지하려 들고, 어떤 것이 없으면 내내 괴롭고.
사람이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그런 중독현상/습관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이고, 진리가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는 것은 바로 그토록 찾아 헤매는 대상과 끊지 못하는 습관들이 모두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진리’를 알게 되는 것이다라는 말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을 끊어내는 것, 벗어나는 것이 일생을 통해 지속되는 괴로움이라는 것 또한 틀린 말이 아니니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