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비판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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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떤 것을 비판하는 것은 그 대상이 싫어서 미워해서 마땅치않아서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여러 가지 경우를 보지만 A가 B를 나무라는 것은, 또 비판하는 것은 단순히 A가 B를 싫어하기 때문에, 보기싫기 때문에, 눈앞에서 사라졌으면 좋았으면 하기에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어떤 것은 어떠하다 라고 이야기할 때 좋고 싫고의 감정을 갖지 않고 이야기한다. 특별히 어떤 존재가 좋다 싫다는 것은 그 존재가 나를 혐오하는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는 이상 내 눈에 보이는, 내 감각이 느끼는 대로 이야기할 뿐이다.
여기서 뭔가 인식의 장애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내가 바라보는 대상이 어떤 이유로든 나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무조건 믿어버리는 것이다. 그 대상의 실재가 어떠한 감정을 가지고 있든간에 무조건 그것을 혐오에 가까운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 대상의 표정으로부터 되도록이면 부정적인 면을 찾으려고 하게 된다.
그 인식의 장애는 또 다른 부정적인 결과를 야기하게 된다. 내가 바라보는 대상이 나에게 아무런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그렇게 받아들인 내 자신의 감정이 긍정적이 될 수 없다. 나의 반응은 무의식적으로도 같은 반응을 보일 수 밖에 없다. 부정적인 포스를 내뿜게 되는 것이다. 이 반응 과정은 진행이 매우 빨라서 내가 대상을 맞이하는 그 순간 곧바로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그 대상과의 교감은 매우 짧은 시간 일어나게 되는데 그 대상의 감정이 무엇이었든 내가 받아들이는 감각과 그 인식 작용은 무조건 부정적일 수 밖에 없다. 그 대상이 그 모든 부정적인 신호를 무시하고 나에게 무조건적인 강렬한 호감의 신호를 보내오기 전엔 말이다.
이러한 인식 방법을 좋다 나쁘다 얘기할 수는 없다. 이 사람이 부정적이다 아니다 인식이 왜곡되어있다 안좋게 얘기해서 이 사람의 인식체계를 변화시켜보려고 하고 있지만, 그 사람이 그러한 인식 방법을 갖게 된 것도 우리가 좋고 나쁨의 기준을 쉽게 말해 bayesian approach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면 부정적인 인식을 하는 사람의 경우는 자신의 감각이나 인식 과정에서 오판이 일어나는 것에 비중을 두고 있기 때문이고 긍정적인 인식을 하는 사람은 오판을 하지 않았을 때 얻어지는 이득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상대방이 날 어떻게 바라보느냐는 내가 정확히 알 수 없는 문제이고 단지 내가 그것을 좋은 쪽으로 인식해서 오는 손실이 크다고 내부적으로 기준을 가지고 있다면 인식은 당연히 부정적으로 기울게 되고 반대로 좋은 쪽으로 인식해서 오는 이득이 크다고 판단하면 긍정적인 판단으로 기울 수 밖에 없다.
이러한 판단 기준은 자신의 과거의 경험을 통해 학습된 것이라 그 이유를 어디에서 찾아내든 원인이 무엇이냐를 규명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앞으로 이것을 어떻게 운용할 것이냐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 좋다 나쁘다의 문제가 아니라 스스로 오판을 통해서 얻어지는 손해나 상처를 내가 얼마나 감당할 수 있는 것이냐이다.
그러니까 세상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라고 얘기해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고 하기 보단 추구하는 바가 다를 뿐이다. 다시 말해 시스템을 convervative하게 가져가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식시스템을 긍정적으로 가져가서 시스템의 overshoot을 크게 하는 것이 스스로는 부담스럽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시스템이 긍정적인 상황에 잘 반영하게 되면 오판을 했을 때의 데미지도 커지게 되니까 그 무엇이 되든지 stability만을 추구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trade off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만약 내 앞에 일어나는 일을 좋고 나쁨으로 나누고 그것의 확률이 보다 좋은 쪽으로 기울어졌는데 내 인식 시스템이 여전히 안정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가면 그것이 손해일 수 밖에 없고 반대로 나쁜 일이 일어날 확률이 커진다면 나의 안정추구의 시스템 운영방향은 나 자신을 위해 현명한 판단이었다고 볼 수 있다는 말이다. 그것의 모든 결과는 내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이니까 어떤 사람의 인식 방식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이가 좋다 나쁘다 할 수도 없고 고치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란 말이다.
몹시나 행운아라 좋은 일이 연거춰 수도 없이 일어나고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학습효과에 의해서 스스로 그 사람의 인식시스템이 긍정적인 형태로 변화할 수 밖에 없다. 또 그 스스로가 믿기를 긍정은 긍정을 부른다며 외쳐댈 수 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부정적인 일이 연거풔 일어나는 경우에는 도저히 그 상황을 긍정적으로 볼 수 없다. 또 인식시스템의 경향은 부정적인 쪽으로 기울 수 밖에 없고 안정을 추구하는 방향을 갈 수 밖에 없다. 혹자는 이 경우를 보고 부정은 부정을 부른다고 할 수 있을텐데 그것을 이 사람의 문제라고 말할 수는 없다.
아예 이러한 인식시스템을 깨버리자는 것이 마음공부라든가 명상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 아닌가? 즉, 감각 시스템에서 가져온 신호가 무의미 한 것이므로 그것을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닌 것으로 받아들이자고 하는 것이다. 이 경향은 다시 보면 상황을 안좋은 것으로 인식하는 것 보다도 더 민감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즉, 조금이라도 나쁜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도 감당할 수 없으니까 좋을 것 까지도 모두 포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소위 좋다는 것도 부정하고 나쁘다는 것도 전부 부정하는 것이다. 그냥 존재한다라고만 받아들이는 것이다. 부정적 인식의 극치라고 봐야될 것이다. 이래도 저래도 힘들고 괴로우니까 아예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이거나 아니면 아무 의미가 없다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당당하게 맞선다가 아니라 이러나 저러나 다 힘드니 아예 아무것도 안하겠다고 도망가버리는 것이다.
결국, 나 자신이든 그 누구든 그 사람이 긍정적이다 부정적이다 비관적이다 나무라는 것은 의미가 없다. 역지 사지라는 것도 있을 수가 없다. 지금의 그 사람은 그 사람이 겪어온 일의 결과이고 그 경험을 통해 학습된 결과이다. 물론 그 바탕은 그의 부모의 유전적 성향과 양육 환경에 의해 이룩된 것이다. 그 누구도 스스로를 파괴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인식체계를 운용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잘못되었다 틀렸다라고 인식하는 그 자체는 그 자신의 인식체계에 기인할 수 밖에 없다.
요컨데, 내 인식 시스템도 우리가 아는 다른 몸의 장치와 같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냥 놔두면 내 현재 상황을 그대로 반영할 수 밖에 없다. 마치 non-supervised learning이 되고 있다는 상태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을 운영하는 상위의 주체가 supervised learning을 강제로 할 수 있다. 내 인식 시스템이 맘에 들지 않으면 그냥 내가 바꾸면 된다. 이를테면 너무 부정적으로 편향되어있다 생각되면 일부러 좋은 예를 가져다가 좋은 것이라고 인식시키면 된다. 어쨌든 그것에 대한 결과도 내가 감내해야 한다. 어차피 내 인식시스템을 좋은 쪽으로 튜닝해놓았으니까 결과가 안좋아도 좋게 인식하게 된다. 좋다/나쁘다의 기준이란 것도 역시 학슴이라 그냥 시스템을 망가뜨려서 그냥 좋다고만 바라보는 것이다. 이도 저도 아닌 것이다 라고 받아 들이나 무조건 나쁜 것이라고 받아들이나 그게 그거다.
다만 타자들이 바라보기에 긍정적으로 좋게 생각하는 것을 좋게 생각하니까, 신경을 덜 쓰이게 만드니까, 짜증나게 하지 않으니까 ‘긍정적’인 것이 좋다고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