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 효용 체감 법칙: A law of diminishing marginal uti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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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근래 볼만한 일본 드라마 거리도 다 떨어지고 영화도 볼 만큼 보고나니 재미 있는 일이 없어서 섭섭하던 차에 뭘 하면 좋을까 생각하다 문득 떠오른 말이 바로 ‘한계 효용 체감의 법칙’이란 것이다.
드라마도 좋은 작품을 처음 한 두개 볼 때는 너무 재미있어서 등장인물 모두 너무 맘에 들고 좋다가도 그것을 수십편을 넘게 연속해서 보다보면 감동과 재미가 점점 떨어져서 결국엔 이게 이렇다는 둥 저게 저렇다는 둥 하게 된단 말이다. 아마도 이것이 평론가의 심정이 아닐까 하는, 즉 평론하려는 대상에게 이미 질리고 질려버린 단계에 이른, 한계 효용이 0인 생각도 든다만. 어쨌든 지금은 좋은 오락거리 자체가 떨어져버린 상황이라 슬슬 그 전까지 날 기쁘게 해주었던 것들에 대한 고마움이 새록 새록 솟아오르는 상황이다.
이 용어 자체를 놓고 보면 그래도 얻어들은 것이 있는지라 말 자체로 그 의미를 위와 같이 파악할 수는 있지만, 하필 왜 이렇게 한방에 와닿지 않는 말을 사용해야 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아마도 이 용어는 일본인들이 만들었을 것 같다만. marginal이라는 말을 번역할 때 ‘한계(boundary)’로 가져왔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내가 바라보는 바로는 한계가 아닌 ‘여분’이 더 맞을 것 같단 생각이 든다만. 즉, 어떤 재화가 가진 근본적인 효용성은 사실 일정 시간 동안은 변치 않는 대신 그것에 대한 ‘여분’의 효용성이라는 것은 다분히 소비자의 주관적인 측면이 있기 때문이니까 말이다. ‘한계 효용’이라고 하면 언뜻 이해하기에 효용이 한계에 이르렀다는 것인지 아니면 한계를 넘어서는 효용이라는 것인지 애매하다.
어쨌든 이 용어의 뜻는 영어 표현이 나타내는 그대로 marginal utility가 감소하는 법칙이란 뜻이다. marginal utility라는 것은 문자 그대로 해석해볼 때 어떤 물건이 가지고 있는 효용성(utility)에서 여분의 효용성, 즉 소비자가 그것을 소비할 때 그 재화가 가진 기능적인 효용성이 아닌 감정적 또는 심미적으로 느끼는 효용성이 아닐까 한다. 이를테면 어떤 신제품이 나왔을 때 처음 손에 들고 ‘아! 이 물건 정말 좋다!’ 하는 감동 차원의 효용성 말이다. 아이폰 신제품을 누구보다 먼저 받아들기 위해서 매장 앞에서 숙식하는 것도 아마도 이 marginal utility를 극대화하기 위한 노력이지 않을까 한다만.
소비자 입장에서는 이 물건을 아무리 많이 사더라도 그 물건의 근본적인(fundamental?) 효용성, 즉 기능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러나 그 물건을 소비할 때 받아들이는 ‘감동’ 또는 ‘감정적’ 측면에서의 ‘만족감’은 물건을 소비하면 소비할 수록 점점 떨어지게 된다.
다 철간 이야기이긴 하지만 훈련소에 처음 들어가서 이래 저래 정신없이 지내다가 먹어본 ‘초코파이’의 감동은 그 이전에 먹어오던 (물론 거들떠 보지도 않았지만) 초코파이의 그것과 비교할 수도 없는 수준이긴 하지만, 어느 정도 훈련소 생활이 익숙해지고 먹어대는 초코파이의 개수가 하나 둘 씩 늘어나다보면 더 이상 흥미를 잃게 되듯 말이다.
다행스럽게도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 추억의 초코파이를 오랜 시간 멀리하다보면 (이상하게도 소외감과 단절감을 심하게 느끼던) 훈련소에서의 그 초코파이의 감동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그에 버금가는 수준의 감동을 다시금 느낄 수 있다.
서론이 길었는데, 인생에서의 이 한계 효용 체감의 법칙은 너무나도 큰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다. 이런 비유가 적당할지는 모르겠지만, 개구리 올챙이적 모른다 라는 말이 맞지 싶은데, 사람의 처지가 점점 좋아지게 되면, 또 먹고 사는 상황이 나아지다보면 그 상황에 대해서 감동하고 그만큼 감사하려 하려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열심히 노력해서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운이 좋아서 얻어지게 된 상황이라 할 지라도 매 순간 순간 만족하고 감사해야 맞을텐데, 늘 그 위에 뭔가를 더하고 더해서, 또 나보다 더 좋은 상황에 있는 사람이 가진 것만큼을 더 더해서 더해서 그만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불평을 늘어놓고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내내 달음박질 치려하는 것이다.
분명히 누가 보더라도 상황이 엄청나게 좋아졌음에도 오히려 스스로를 비관하기도 하고 좌절감까지 느끼기도 한다. 우주의 법칙은 이런 것에 냉엄하게 반응하여 어느 날 그 모든 것을 사정없이 앗아가기도 한다. 아니 우주가 나설 것도 없이 사람의 힘으로 그렇게 만들어버린다. 그 사람이 누리던 엄청난 효용의 것들 모두 다 앗아가고 나면 그제서야 그가 누리던 것들의 가치를 알게 된다. 그 역시도 자신에게 가장 필요하고 중요했던 가치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욕심으로 또 남들이 가졌으니까 나도 가져야지, 아니 남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질 자격이 된다는 것을 어떻게든 합리화하고 명분화해서, 내게 필요가 있는 것이든 없는 것이든 가리지 않고 주렁 주렁 다 갖고 나면 어떤 것이 소중한지 필요한지 알지 못한다. 비만환자가 스스로 비만인지 모르면서 더 많은 것을 먹어대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없는 위의 위치에서 많은 것을 누리는 이들을 부러워하는 것도 해볼 가치가 있는 경험이고, 많은 것을 가져보고 누려보는 것 또한 의미 있는 일이고, 너무 많이 가졌다가 몽땅 잃어버리는 경험도 인생에서 가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우린 책으로 또 입으로 수많은 경험과 지식들을 전달받지만 인생에 대한 것은 그 스스로가 다쳐보고 괴로워해보지 않은 이상엔 제대로 이해를 할 수가 없다. 많은 경험을 하고 나서 인생에 대해서 배운다는 것은 사실 배운다기 보단 내 경험들과 지식화된 내용을 비교 확인하는 것에 불과하다. 우린 우리의 양심으로 이미 다 알고 있다. 경험했든 경험하지 않았든. 다만 그 앎을 생활의 법칙으로 삼아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다쳐보고 아파보기 전엔 그저 모호할 뿐.